노향림의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해설 / 유성호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노향림
함박눈발이 아파트 창에 부딪는 날
혼자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6동 반장이 벨을 누른다.
긴급안건으로 모두 모이는 반상회란다.
처음으로 참석해 출석 사인을 하는데
이를 본 한 여성이 어마 시인이시네요,
젊은 날 쓰신 수필집 애독자였어요.
옆자리 중년 여성도 한 마디 한다.
요즘 시는 시인들끼리만 본다던데요.
아직도 시를 읽는 독자 있어요?
그럼요,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있을 때까지
시인은 시를 쓰지요, 말해놓고 나는
눈 오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는 바로 그 시를 쓴
시인 자신인 걸요.
목젖까지 차오르는 이 말 뒤로
한결 더 소리 낮춰 절규하듯 내리는 함박눈
나는 슬그머니 회의 시작 전에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차선도 보도블록도 경계가 지워진 雪國
차량이나 지나가는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과 땅 사이가 넓은 백지의 대설원이다.
그 백지의 시 몇 줄에 필생을 건 나는
언제나 긴급안건은 그것뿐이라고
나는 내 시의 독자다, 혼자 소리친다.
공중에서 놀란 눈발들이 한꺼번에 부서져 내린다.
‘출입금지’ 팻말을 단 아파트 화단 목책 너머
눈 뒤집어쓴 키 큰 나무들의 적막한 발등에
나는 그만 시 한 줄을 꾹꾹 찍고 돌아 나온다.
—《현대시학》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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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시적 탐색
유성호 (문학평론가)
가장 일상적인 반상회 시간에 오간 몇 마디 대화 속에서, 선생은 ‘시인/독자’의 관계론을 상상한다. 이 시편에는 ‘창’으로 갈라진 ‘방 안’과 ‘창 밖’이 있고, 밖에 내리는 ‘함박눈발’과 그로 인한 “경계가 지워진 설국(雪國)이 있다. 이때 ”백지의 대설원“이야말로 시 쓰기의 배경이자 동력을 은유한 형상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애독자들로부터 들은 말 속에서 정말 자신에게 ‘긴급안건’은 ”그 백지의 시 몇 줄에 필생을 건“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그럼요,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있을 때까지/ 시인은 시를 쓰지요“라는 답변은 그 자체로 노향림의 시론(詩論)이 되고,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는 바로 그 시를 쓴/ 시인 자신”이라는 고백은 선생 자신의 독자론(讀者論)이 된다. 결국 시인은 목젖까지 차오르는 이 말을 배음(背音)으로 하여 “나는 내 시의 독자”라고 역설적으로 노래한다. 이때 시인이 발견하는 “화단 목책 너머/ 눈 뒤집어쓴 키 큰 나무들의 적막한 발등”은 바로 시인 자신의 초상이며, “그만 시 한 줄을 꾹꾹 찍고” 나오는 시인은, 백석의 눈을 하이야니 맞고 있을 ‘갈매나무’와는 또 다른, “눈 뒤집어쓴 키 큰 나무들”로 시편 안에 귀착하게 된다. 애잔하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실존적 고백이자 미학적 저항이 아닐 수 없다.
—《문학사상》2016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