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종영의 「빈집」감상 / 채상우
빈집
나종영
빈집에는 빈 술병들이 산다
빈 술병 속엔 푸른 별들이 살고
텅 빈 시간 속으로 정든 집 한 채
들어와 산다
마른 나뭇가지에 그리움이 일듯
붉은 열매 몇 알 매달려 있다
빈집에는 빈 항아리들이 산다
빈 항아리 속에는 조선씨간장 같은
발효된 슬픔이 부풀어 오르고
텅 빈 집에는 눈감은 시간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허공의 길에는 침묵의 구름이
꽃눈 틘 숲에는 어린 새들이 날아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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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적(漢籍)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구덩이를 한 자 파면 땅이 그만큼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실은 하늘이 꼭 그만큼 그곳에 들어차는 것이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이 시만 해도 그렇다. "빈집"에는 다만 사람이 살지 않을 뿐, "빈 술병들"이 살고, 그 술병들마다 "푸른 별들이" 살고, "바람이 세 들어 살고", "빈 항아리들"이 그리고 "눈감은 시간"이 살지 않는가. 그뿐인가. '그리움'이든 '슬픔'이든 "텅 빈 집"은 스스로 잘 "발효"되어 "붉은 열매"를 틔우고 "어린 새들"과 다정하게 이웃하여 지내니, 차라리 가득하여라, "허공의 길"이여. 나는 언제나 저런 꽉 찬 빈집 하나 마음에 들일 수 있을까.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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