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철규의 「검은 방」 평설 / 이숭원
검은 방
신철규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할수록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딱딱해지고 있었다
해변에 맨발로 서 있던 유가족
맨살로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을 때까지 악몽을 꾸어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
학살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꾸는 악몽 같은 것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피가 돌지 않고
눈이 심장과 바로 연결된 것처럼 쿵쾅거렸다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곳이 지옥이다
꽃도 나무도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곳
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못처럼 박혀 있는 곳
죽은 마음, 죽은 손가락, 죽은 눈동자
위로받아야 할 사람과 위로할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는 것인가
우리는 떠올라야 한다
우리는 기어올라야 한다
누구도 우리를 끌어올리지 않는다
가을이 멀었는데 온통 국화다
가을이 지난 지가 언젠데 국화 향이 이 세계를 덮고 있다
컴컴한 방에 검은 비닐봉지를 쓰고 앉아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힌다
꿈속에서도 공기가 희박했다
해변은 제단이 되었다
바다 가운데 강철로 된 검은 허파가 떠 있었다
—《현대시학》2014년 6월호,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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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조선일보〉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철규는 매우 어른스러운 당선소감을 써서 뜻있는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의 상처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상처받은 사람도, 상처받지 않은 사람도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타인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들이다.
타인은 언제나 나의 시야에서 멀어진다. 나를 타인의 자리에 놓지 않을 때, 타인의 눈빛과 목소리에 집중하지 않을 때, ‘소통’은 거짓과 위선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핍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조금씩 버리는 것이 용기라고 생각한다. 나의 구원만큼 타인의 구원도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보는 현실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위대한 거절’을 실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아이에서 진정한 어른이 된다. 그러나,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우리는 이 글에서, 타인이 나의 시야에서 언제나 멀어지지만 나를 타인의 자리에 놓고 타인의 눈빛과 목소리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바라보는 현실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지성적 유보 의식을 내보인 점이 믿음직스럽다. 그는 세계를 성찰하면서 타인을 이해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타인에 대한 지향성은 첫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의 ‘시인의 말’에도 투명하게 진술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매우 뚜렷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시인이다.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 숨을 곳도 없이 길바닥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이 더는 생겨나지 않는 세상이 언젠가는 와야 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겠다.” 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대하는 공리적 담론인가? 이러한 생각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음성에 든든한 믿음을 얻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신철규의 시집은, 21세기에 들어와 파격과 전복으로 이어져 온 젊은 시단의 기류에 시의 정도를 보여줌으로써 신생의 변곡점을 제시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시집이다. 그는「소행성」에서 “우리는 금세 등을 맞대고 있다가도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입술이 된다.”고 썼다. 등단 소감이나 시집 출간 소감의 말과 부합하는 내용이다. 소박한 위안의 말로 가득한 이 시를 시인은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로 끝맺었다. 이 시구에 담긴 깊은 자의식과 미세한 떨림을 우리는 의미 잇게 감촉한다. 문제는 이러한 담론이 앞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추상의 차원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의문은 그의 작품이 스스로 밝혀줄 것이다.
⁎
세월호 참사를 두고 많은 시가 쓰였다. 신철규는 세월호 관련 시도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이 시 「검은 방」에는 추상이 없다. 첫 행부터 끝 행까지 모든 시행은 상황의 구체성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그 구체적 진술은 서술로 구성되지 않고 비유와 상징으로 구성되었다. 시적 언술이기 때문이다. 시적인 비유를 구사하면서도 상황의 구체성을 살리는 방법. 그것이 시를 제대로 쓰는 방법이다. 신철규는 그러한 능력을 갖춘 드문 시인의 하나다. 그는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고 말했다. 그렇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것은 배 안에 남았다가 탈출의 기회를 잃은 희생자들의 슬픔의 무게로 가라앉은 것이다. 그 슬픔에는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다. 그들의 죽음이 슬픈 것이요 그 죽음을 속수무책 지켜본 우리 모두가 슬픈 것이다. 이처럼 세월호 참사의 본질을 명쾌히 집약한 시구는 없다. 세월호의 침몰을 볼 때는 국민 모두가 슬퍼하고 일심동체였는데 시간이 지나자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라져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세상이 요동쳤다. 그러니 이 시의 첫 두 행은 세월호 참사의 본질과 그 후의 혼란까지를 감싸 안는 복합적 명구가 된다. 이것이 정밀한 관찰과 깊은 사색에서 도출된 구체성의 표현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시구들이 상황의 구체성을 연이어 드러낸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에 가득 고인 검은 물, 가만히 있어도 몸에 힘을 주어도 결국 딱ㄸㄱ해지는 몸, 맨발로 서서 악몽에 몸부림치는 유가족, 쿵쾅거리는 사람들의 동요와 분노, 처절한 죽음 앞에 기도 외에는 선택할 것이 없는 사람들의 절망, 결국 그 지옥에서 자신을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자각, 이러한 구체적인 사유와 표현을 통해 마지막 도달한 곳은 “강철로 된 검은 허파”의 자리다. “해변은 검은 제단이 되었다”고 시인은 썼다. 팽목항을 가 본 사람이라면 이 시행의 폭발적 구체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해변이 검은 제단이 되었다고 말은 못해도 그 비슷한 느낌은 누구든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철로 된 검은 허파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에 잠기면 허파가 기능을 상실한다. 캄캄한 물속에서 숨이 멈추었으니 정지된 허파는 검은 허파일 것이다. 세월호가 쇠붙이로 만들어진 것이니 강철이 연상될 만하고 강철처럼 견고하여 넘을 수 없는 경계로 버텨선 죽음이니 강철로 된 검은 허파라 해도 되리라. 그러면서도 그것이 강철로 된 검은 허파였다면 죽음의 바다에서도 살아남았을 것이라는 또 하나의 상상을 하게 된다. 강철은 죽음의 냉엄함을 상기시키면서도 죽음을 넘어서는 의지의 강인함을 동시에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철이 갖는 이중의 의미에서 오히려 비유의 절묘함을 깨닫는다. 세월호는 지금 견인되었지만 우리 기억의 강인함 속에 “강철로 된 검은 허파”로 바다 위에 떠 있고 거기서 숨진 영령들도 모두 그렇게 바다 위에 떠 있다. 그러니 신철규는 “강철로 된 검은 허파”의 구체적 이미지 하나로 한국시사의 바다 위에 자기 자리를 굳건히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구체적인 시적 비유, 표현이 갖는 힘이다.
⸺계간 시지《발견》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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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 / 문학평론가. 1955년 서울 출생. 1986년 《한국문학》으로 등단. 저서 『목월과의 만남』『김종삼의 시를 찾아서』『미당과의 만남』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