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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시리즈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2.01.12|조회수1,095 목록 댓글 0

시집 시리즈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

 

                                                                                   글 : 김정수            2021.12.20  주간경향  1457호

 

 

책의 인식표는 ISBN입니다. 국제표준도서번호가 책 뒤표지와 판권에 새겨져 있지요.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각종 도서에 부여하는 고유한 식별기호로 국명, 출판사, 도서코드 등 13개의 숫자로 표시됩니다. 하지만 이런 서지 정보는 책을 고르는 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독자들은 어떤 정보로 책, 특히 시집을 고를까요. 어려울 것 같지만 의외로 간단합니다. 첫 번째는 이름입니다. 시인의 이름을 보고 구입하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출판사입니다. 시집을 낸 출판사가 믿을 만한가입니다. 꾸준히 좋은 시집을 내는 출판사의 시집을 고르면 실패할 확률이 낮아집니다.

 

박해람 시인(왼쪽)과 박해람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여름밤위원회> /시인의일요일



오래 시집 시리즈를 내고 있는 출판사들

이 땅에는 좋은 시집을 발간하는 출판사가 참 많습니다. 창비,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문학동네, 현대문학사, 현대시학사, 실천문학사, 천년의시작, 여우난골, 걷는사람, 파란, 북인, 문학의전당, 시산맥, 포지션…. 구체적으로 들어가볼까요. 먼저 ‘창비시선’은 1975년 신경림의 <농무>를 시작으로 김수우의 <뿌리주의자>까지 46년 동안 466권(이하 12월 1일 기준)을 냈습니다. 매년 약 10권을 발간한 셈이지요.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시작으로 임지은의 <때때로 캥거루>까지 563권을 냈습니다. ‘창비시선’보다 3년 늦게 시작했지만, 오히려 97권을 더 발간했지요. ‘민음의 시’는 1986년 고은의 <전원시편>을 시작으로 박정대의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까지 293권을 냈습니다. ‘민음의 시’ 이전에 1974년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부터 1991년 안도현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까지 ‘오늘의시인총서’ 30권

과 1972년부터 ‘세계시인선’을 발간했습니다.

문학동네는 후발주자지만 창비, 문학과지성사, 민음사의 명성을 금방 따라잡았습니다. ‘문학동네시인선’은 2011년 최승호의 <아메바>를 시작으로 이재훈의 <생물학적인 눈물>까지 166권을 냈습니다. ‘시작시인선’은 2002년 젊은시인 61인 앤솔로지 <즐거운 시작>을 시작으로 강문숙의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까지 402권을, ‘시인수첩 시인선’은 2017년 고운기의 <어쩌다 침착하게 예쁜 한국어>를 시작으로 이서화의 <날씨 하나를 샀다>까지 53권을 냈는데, 정한용의 <천 년 동안 내리는 비>(시인선 42)부터 출판사를 문학수첩에서 여우난골로 바꿔 발간하고 있지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은 2018년 박상순의 <밤이, 밤이, 밤이>를 시작으로 오은경의 <산책 소설>까지 37권을 냈는데, 친필사인이 든 6권의 시집을 세트로 만들고 있습니다.

수도권의 ‘실천문학시인선’(46권), ‘파란시선’(93권), ‘걷는사람 시인선’(49권), ‘현대시세계 시인선’(137권), ‘현대시학 시인선’(84권), ‘포지션사림’(15권), ‘현대시 기획선’(65권), 서울에서 단양으로 적을 옮긴 ‘시인동네 시인선’(134권) 등도 읽을 만합니다. 그리고 부산의 ‘전망시선’(129)·‘사이펀 현대시인선’(10권)·‘산지니 시인선’(10권), 대구의 ‘시와반시 기획시인선’(22권), 대전의 ‘지혜사랑 시인선’(242권)·‘애지시선’(105권), 전주의 ‘모악시인선’(26권), 광주의 ‘시와사람 서정시선’(52권)·문학들시선(62권), 춘천의 ‘달아실시선’(48권), 제주의 ‘다층현대시인선’(170권) 등 전국적으로 주목할 만한 시집 시리즈가 있습니다. 다 언급 못 했지만, 이외에도 문학잡지와 시집을 동시에 발간하는 곳이 꽤 많습니다. 아울러 ‘세계사 시인선’이 2016년 177권으로, ‘문예중앙시선’이 2018년 56권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것은 참 안타깝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시리즈 ‘시인의일요일시집’

사라지는 것이 있으면, 새로운 것도 있겠지요. 경기도 용인에 적을 두고 있는 ‘시인의일요일시집’의 첫 책은 박해람의 <여름밤위원회>입니다. 출판사 이름도, 시집 제목도 눈길을 확 사로잡습니다. 출판사 관계자는 “시인의 자존심을 지키려 시집 전문 출판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좋은 시집을 출간할 수 있는 출판사는 한정돼 있고, 몇몇 대형 출판사가 독과점 형태로 유지하고 있다네요. 유명 출판사에서 시집을 출간하는 것이 자신의 시적 능력을 인증받는 것처럼 돼버려 거기서 시집을 출간하려 수년씩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랍니다. 그런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 시집 시리즈를 시작했다는군요.

시집의 문호는 항상 열려 있지만, 흔히 ‘낀세대’라 불리는 40~50대 시인을 중심축으로 발간할 거랍니다. 한데 2022년에 출간할 시집이 벌써 정해져 있다네요. 그들은 줄서기를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시인들로 개성 있는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다고 합니다. 목록을 보니 002 김륭의 <나의 머랭 선생님>, 003 이병국의 <내일은 어디쯤일까>가 예정돼 있습니다.

‘시인의일요일시집’의 스타트를 끊은 박해람 시인은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199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와 <백 리를 기다리는 말>이 있지요. 예리한 관찰력과 돌연적 이미지, 견고한 묘사력을 인정받고 있는 박 시인을 첫 주자로 모신 것은 좋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시집 홍보자료에는 “자료를 보기 전에 시집 아무 곳이나 펼쳐서 먼저 시 한편을 읽어보길 부탁”했네요. 그만큼 자신 있다는, 엄선했다는 의미겠지요.

시인은 “두 번 접은 비밀과 일곱 번 접은 비밀을 한 가지 말투로 이야기했다”고 ‘시인의 말’에서 밝혔습니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는 혼자지만, 삶은 혼자일 수 없겠지요. 나와 당신, 혹은 가족처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시로 표현한다는 뜻일 겁니다. 모쪼록 ‘시인의일요일시집’ 시리즈가 번창했으면 좋겠습니다.

한 인터넷서점 등록기준으로 보면, 연간 3000여권의 시집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 많은 시집 중에서 좋은 시집을 고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가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시 한편

 

여름밤위원회*

 

 

웅덩이에는 날파리가 왱왱댄다

물결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소녀의 얼굴이 몇 살인지는 나도 몰라

 

꽃씨가 흘러나오는

소녀의 얼굴,

왜 태양을 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지

찡그린 꽃씨라고 말하지 않는 거지

 

언젠가 뒷면에 침을 발라 붙인 달이 아직도 편지봉투에 떠 있다

 

여름밤위원장의 팔에 달무리가 채워져 있고 땋은 머리를 풀자 여러 개의 밤길이 사라진다

 

가장 큰 날개는

가장 작은 날개를 먹을 수 없지

부엉이와 날파리는 외계

확성기는 가까운 말

 

거수擧手를 하는 꽃들의 한 뼘

한밤의 풀밭에 얼굴을 터는

소녀들의 파종기

주근깨라 불리는 검은 별들

 

돌을 던지면 머물던 장소들이 사라진다는 귓속말,

방심한 곳에 쪼그리고 앉아 달무리를 올려다보면 부르르 떨리는 웅덩이들,

가상의 뼈를 활짝 여는 하품

 

여름밤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여름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계절이고

박수는 가장 오래된 의견이다

몇몇 번지는 의견은 제외되었다

 

* 헤르타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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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_id=202112101434461#csidxddd4cc63997c49e867bd1923fa987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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