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엽의
현대시 창작 강의
제 1 장
시의 정의
1. 시창작 교육은 가능한가
2. 시란 무엇인가
3.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
가. 동일화의 원리
나. 순간과 압축성
1.시창작 교육은 가능한가
글쓰기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는 것은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학생들 대부분은 선천적인 기질이 있어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 간단한 편지글이나 연설문 혹 논설문이라면 몰라도 시나 소설이라면 써보려는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는 시창작에 관하여 10여년 이상 작품 지도를 해오며 수십 명을 문단에 내보냈다. 그중 한 경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분은 고교생 때 문학을 좋아했다는 이유 하나로 시를 써보겠다고 생면부지의 나에게 왔다. 시라는 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랐으며 시에 관한 지식은 고작해야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전부였다. 그는 매주 2 ~ 3편의 작품을 내게 가져왔다. 그러다 지치겠지 싶어 처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그는 시라는 것을 써왔고 몇 달 동안은 대부분 단 한 줄도 건질 것이 업슨 붉은 줄 투성이였다. 1 년이 지나도 쉽게 좋아지질 않았다. 부려 쓰는 어휘량이 적어 국어사전을 베껴 쓰게했다.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2년이 지나자 붉은 줄이 줄어들고 드문드문 군더더기 없는 훌륭한 소품들도 써내개 되었다. 어느덧 5년이 지났고 그는 줄잡아 5~6백 편의 작품을 썼다. 그중 2~30편을 골라 신춘문예에 투고하였다. 최종심에서 떨어지는 수준까지 발전되었다. 그는 순수문예지 중 가장 힘든 관문이라는 월간 시 전문지를 통해 2000년에 화려하게 데뷔를 했다. 90% 노력으로 얻은 결과였다. 물론 이보다 훨씬 빠르게 정상에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문학을 하겠다고 무작정 아무도 없는 타지에 온 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도 나가 더러 상도 받고 상당한 창작을 해온 경우였는데 오히려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예 백지 상태의 경우는 새로 색깔을 칠할 수 있지만 이 학생의 경우는 문제가 달랐다. 시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고정관념이 강했다. 쉽게 아집을 버리지 못했다. (이 현상은 대게 5,6년 정도 시 창작 공부를 해온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 잘 못된 지도가 빚은 경우가 대부분 이 경우에 해당된다 ) 대학교 1,2 학년의 경우 고등학생 시절 문학 소년이나 소녀로서 가질 수 있는 감상성인데 반해 이 학생의 경우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거기에 자기식의 고집까지 덧칠하고있었던 것이다. 비유라고 쓰는 것들이 완전히 낡아 있고 고정화되어서 요지부동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무조건 30여권의 정선돈 시집을 읽혔다.(나의 시 쓰기 수업은 대부분 이 과정을 거치도록한다. 나는 이 30여권의 시집을 해설한 책을 작년에 『21세기한국의 시학』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 바 있다. 이 서문에도 밝힌 바 있지만 이 방법은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괄목할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이 고정을 성실하게 잘 이행한 학생의 경우는 거의가 환골탈태의 자기 도약을 이루었다. 남의 작품을 읽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시인의 흉내를 낼까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 좋은 시집을 끊임없이 정독하는 것이 시창작의 첫걸음이다!) 이 시집들을 정독하면서 좋은 시를 베끼고 가급적이면 암기하도록 했다. 이론 강의는 강의 시간에 다른 학생들과 같이 하도록 했다. 2학년 1학기가 지나자 급속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5,60대의 죽은 비유가 아니라 20대의 발랄한 비유를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2학년말에는 중앙일보 최종심을 , 3학년에는 결국 그 관문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통과하여 당당히 당선되었다. 만 20세 최소 당선자라며 대서특필이 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창작교육은 가능하다. 시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시인과 소설가가 될 수 있다. 얼마 만큼의 제대로 된 노력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제대로 된'이라는 말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창작을 맡은 교사는 올바른 창작교육을 해야하며 학생은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 열두시간을 몇 년 씩 투자해야 어찌어찌 고시에 합격하지 않던가. 만약 글쓰기에 그만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누구인들 시인과 소설가가 되지 않을 수 없으랴. 문학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전부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 창작을 시작하려는 초보자의 경우는 물론이고 ,창작에 몇 년 동안 매진해 왔지만 등단의 관문을 거치지 못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시의 길은 어떤 때는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예술의 길은 끝이 없다. 시의 길 도한 마찬가지다. 등단하고 나서도 이점은 마찬가지다. 내가 쓰고 있는 시가 과연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그 바른 길은 어느 길인가. 설사 바르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시는 인류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등 그 질문은 끝없이 반복되고 지속된다. 여기 현대시 창작 강의를 연재하는 이유는 내 스스로가 시에 대해서 완전히 알고 있다고 해서가 아니고 이 반복된 질문의 자기 확인을 점검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라 보아도 좋다. 그러므로 이 연재는 완성형이 아니라 중간 답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보면 좋겠다.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서 시 창작에 대해 고민해보고 그 고민의 결과물이 앞으로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문학도들에게 자그마한 힘이 되어준다면 이 글을 쓰는 목적의 대부분은 성취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인용 작품은 되도록 90년대 이후의 작품으로 하되 시 원문은 한편 한 편의 전체적인 감상이 될 수 있도록 가급적이면 각 작품의 전체를 인용하도록 하겠다.
현대시 창작 강의
제 1 장
시의 정의
1. 시창작 교육은 가능한가
2. 시란 무엇인가
3.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
가. 동일화의 원리
나. 순간과 압축성
1.시창작 교육은 가능한가
글쓰기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는 것은 천부적인 자질이 있어야 가능한 것은 아닐까. 학생들 대부분은 선천적인 기질이 있어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 간단한 편지글이나 연설문 혹 논설문이라면 몰라도 시나 소설이라면 써보려는 엄두조차 내본 적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는 시창작에 관하여 10여년 이상 작품 지도를 해오며 수십 명을 문단에 내보냈다. 그중 한 경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분은 고교생 때 문학을 좋아했다는 이유 하나로 시를 써보겠다고 생면부지의 나에게 왔다. 시라는 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몰랐으며 시에 관한 지식은 고작해야 고등학교 때 배운 것이 전부였다. 그는 매주 2 ~ 3편의 작품을 내게 가져왔다. 그러다 지치겠지 싶어 처음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고 그는 시라는 것을 써왔고 몇 달 동안은 대부분 단 한 줄도 건질 것이 업슨 붉은 줄 투성이였다. 1 년이 지나도 쉽게 좋아지질 않았다. 부려 쓰는 어휘량이 적어 국어사전을 베껴 쓰게했다.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2년이 지나자 붉은 줄이 줄어들고 드문드문 군더더기 없는 훌륭한 소품들도 써내개 되었다. 어느덧 5년이 지났고 그는 줄잡아 5~6백 편의 작품을 썼다. 그중 2~30편을 골라 신춘문예에 투고하였다. 최종심에서 떨어지는 수준까지 발전되었다. 그는 순수문예지 중 가장 힘든 관문이라는 월간 시 전문지를 통해 2000년에 화려하게 데뷔를 했다. 90% 노력으로 얻은 결과였다. 물론 이보다 훨씬 빠르게 정상에 접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문학을 하겠다고 무작정 아무도 없는 타지에 온 학생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고등학교 때 백일장에도 나가 더러 상도 받고 상당한 창작을 해온 경우였는데 오히려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예 백지 상태의 경우는 새로 색깔을 칠할 수 있지만 이 학생의 경우는 문제가 달랐다. 시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고정관념이 강했다. 쉽게 아집을 버리지 못했다. (이 현상은 대게 5,6년 정도 시 창작 공부를 해온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 잘 못된 지도가 빚은 경우가 대부분 이 경우에 해당된다 ) 대학교 1,2 학년의 경우 고등학생 시절 문학 소년이나 소녀로서 가질 수 있는 감상성인데 반해 이 학생의 경우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거기에 자기식의 고집까지 덧칠하고있었던 것이다. 비유라고 쓰는 것들이 완전히 낡아 있고 고정화되어서 요지부동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무조건 30여권의 정선돈 시집을 읽혔다.(나의 시 쓰기 수업은 대부분 이 과정을 거치도록한다. 나는 이 30여권의 시집을 해설한 책을 작년에 『21세기한국의 시학』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 바 있다. 이 서문에도 밝힌 바 있지만 이 방법은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괄목할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이 고정을 성실하게 잘 이행한 학생의 경우는 거의가 환골탈태의 자기 도약을 이루었다. 남의 작품을 읽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시인의 흉내를 낼까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 좋은 시집을 끊임없이 정독하는 것이 시창작의 첫걸음이다!) 이 시집들을 정독하면서 좋은 시를 베끼고 가급적이면 암기하도록 했다. 이론 강의는 강의 시간에 다른 학생들과 같이 하도록 했다. 2학년 1학기가 지나자 급속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5,60대의 죽은 비유가 아니라 20대의 발랄한 비유를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2학년말에는 중앙일보 최종심을 , 3학년에는 결국 그 관문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통과하여 당당히 당선되었다. 만 20세 최소 당선자라며 대서특필이 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창작교육은 가능하다. 시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시인과 소설가가 될 수 있다. 얼마 만큼의 제대로 된 노력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여기서 '제대로 된'이라는 말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창작을 맡은 교사는 올바른 창작교육을 해야하며 학생은 부단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 열두시간을 몇 년 씩 투자해야 어찌어찌 고시에 합격하지 않던가. 만약 글쓰기에 그만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누구인들 시인과 소설가가 되지 않을 수 없으랴. 문학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전부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시 창작을 시작하려는 초보자의 경우는 물론이고 ,창작에 몇 년 동안 매진해 왔지만 등단의 관문을 거치지 못한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시의 길은 어떤 때는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듯 예술의 길은 끝이 없다. 시의 길 도한 마찬가지다. 등단하고 나서도 이점은 마찬가지다. 내가 쓰고 있는 시가 과연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그 바른 길은 어느 길인가. 설사 바르지 않는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시는 인류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등등 그 질문은 끝없이 반복되고 지속된다. 여기 현대시 창작 강의를 연재하는 이유는 내 스스로가 시에 대해서 완전히 알고 있다고 해서가 아니고 이 반복된 질문의 자기 확인을 점검해보자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라 보아도 좋다. 그러므로 이 연재는 완성형이 아니라 중간 답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보면 좋겠다.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서 시 창작에 대해 고민해보고 그 고민의 결과물이 앞으로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문학도들에게 자그마한 힘이 되어준다면 이 글을 쓰는 목적의 대부분은 성취된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인용 작품은 되도록 90년대 이후의 작품으로 하되 시 원문은 한편 한 편의 전체적인 감상이 될 수 있도록 가급적이면 각 작품의 전체를 인용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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