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리의 「번안곡」 평설 / 박남희
번안곡
이기리
빈방은 파동
닫으면
더 정확한 울음을 들을 수 있다
천장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변기 물을 내리고 그릇을 깨고 벽을 친다
물을 머금고 웅얼거리는 듯한 대화가 거뭇한 방을 맴돌고
이따금 고함과 비명이 두 귀를 잡아당긴다
위에서 들리는 건지 아래에서 들리는 건지 헷갈려서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녹슨 경첩을 보고 있으면
저녁이 창문을 찢고 들어온다
벽지는 갈라지는 방식으로 숨겨진 틈을 찾는다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있는 왼팔
누워 있는 것조차 버거울 때
안의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먼저 밖으로 빠져나간 소리가
다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약한 방들이 많고
가까울수록 파장은 커진다
밤새 닫아 두었던 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흰빛에 가까운 뒷모습이 들썩이고 있다
*이기리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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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리 시인은 20대의 나이에 김수영문학상 비등단 신인 첫 수상이라는 특이한 이력을 얻으면서 등단한 주목받는 신인이다. 2020년에 간행된 제39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집인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에 실려있는 이 시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가난과 폭력을 체험한 시인의 삶의 편린들을 아련한 실루엣처럼 보여주는 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번안곡’이라는 이 시의 제목처럼 시집에 드러나 있는 시인의 삶은 어딘가 낯설고 어설프다. “빈방은 파동/ 닫으면/ 더 정확한 울음을 들을 수 있다”는 이 시의 첫 구절은, 앞으로 전개될 이 시의 예사롭지 않은 울림의 전조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는 것 보다는 닫아야 더 잘 들린다는 역설은 빈 방이 파동으로 되어 있다는 것과 관계된다. 파동은 퍼져나가 어디론가 전파되기 쉬운 특성이 있는데, 닫아야 더 잘 들린다는 것은 밖에 오히려 더 큰 소음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층간소음이 주된 소재인 이 시는 일반 아파트에서 경험하는 층간소음과는 다른 차원의‘가난’이 배여 있어서 가슴을 저릿하게 해준다. 이 시에서 화자가 있는 공간은, 너무도 생생하게 들리는 층간소음이 위인지 아래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방음이 되어 있지 않은 낡은 공간이다. “녹슨 경첩”이나 “벽지는 갈라지는 방식으로 숨겨진 틈을 찾는다/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있는 왼팔/누워 있는 것조차”버겁게 느껴진다는 화자의 진술만으로도 화자가 생활하는 공간이 얼마나 낡고 협소한 곳인지를 알 수 있다.
이처럼 열악한 삶의 환경은 단지 화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안의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먼저 밖으로 빠져나간 소리가/ 다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진술은 화자가 살고 있는 곳이 안과 밖이라는 구별로 보호 받을 수 없는 “연약한 방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곳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시에 등장하는 ‘소리’는 표면적으로는 층간소음이지만 그 속에는 부대끼는 삶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다. 그런 점에서 가난하고 허술한 집의 소리가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일련의 과정은 ‘가난’이나 ‘고통’의 대물림이 쉽게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해준다.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환경이 낯설다. 이 시의 제목이 ‘번안곡’인 것은 화자 스스로도 자신의 삶이 어딘가 낯선 삶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밤새 닫아 두었던 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흰빛에 가까운 뒷모습이 들썩이고 있다”는 진술은 캄캄한 골방과도 같은 곳과 대비되는 “흰빛에 가까운 뒷모습”을 강조해서 전경화 한다. 왜‘흰빛’이 아니고 ‘흰빛에 가까운’빛이고,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일까? 이런 진술에는 화자의 눈에 비친 환한 세상조차 어쩌면 ‘흰빛에 가까운’ ‘뒷모습’으로서의 희미한 실루엣만 보여주는 그런 곳일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숨어있다. 이기리의 시에는 다른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젊은 세대를 뛰어넘는 정서가 녹아있다. 이러한 개성은 앞으로 이 시인의 시들이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지점에서 새롭게 빛나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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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당선. 시집 『폐차장 근처』 『이불 속의 쥐』 『고장 난 아침』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평론집 『존재와 거울의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