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의 「가능주의자」 평설 / 김지윤
가능주의자
나희덕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 오시프 만델슈탐, 「시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2012, 조주관 옮김, 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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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시집 『가능주의자의 표제시 「가능주의자」는 이 사회에 잠재되어 있는 역능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베라르디의 표현처럼 “가능성을 전개하고, 그것을 현실화하는 주체적 에너지”인 ‘능력’(potency)이 차갑고 언 땅 어딘가에 씨앗처럼 묻혀 있을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낙관주의가 아니다. ‘시인의 말’에서처럼 “어떤 핏기와 허기와 한기가 삶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만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바뀌기 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무엇을 바꾸려고 했는지,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 잊는다면 아무 것도 변하게 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생각만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시인은 「가능주의자」에서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만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보여준다.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가능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라는 회의와 불안, 환멸이 지나간 뒤에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펜을 든다. 반딧불이가 작은 빛을 깜박이기 위해서는 어둠을 헤치고 다닐 수 있도록 어둠에 밝은 눈이 있어야 한다.
어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그림자에 잠길 필요가 있다. 나 역시도 어둠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어둠과 제대로 맞설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은 어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 시대를 돌파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시인은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라고 말한다. 빛을 어둠에 기대어 찾을 수 있고,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어둠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에 적응하되 어둠을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된다. 빛을 망각하거나, 빛이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어둠 속에 주저앉아 어둠의 일부가 된다.
베라르디는 이것을 현대의 니힐리즘이라고 부른다. 그의 날카로운 비판처럼, 우리 사회는 양극화와 무한경쟁 속에 파편화되며 허무주의에 순응해가고 있다. 그가 보기에 사회의 무능력을 초래하는 니힐리즘은 상상력의 위기이며, 꿈의 빈곤이다. 그리고 이 난국을 타개하는 데 문학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베라르디에 따르면, 시에서 의미는 “미리 존재하는 현실의 재현이나 지시대상과의 조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소리, 목소리, 리듬 등이 환기하는 힘에서 나온다.”그는 시가 지시대상으로부터 언어 기호를 해방시키는 점에 주목하며, 이처럼 언어에 새로운 활력을 주는 시가 사회적 자율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 보았다.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라고 시인은 쓰고 있지만,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승산이 낮더라도 ‘가당찮은 꿈’을 꾸기 때문이다. 시는 성공한 지배자의 역사보다 실패한 꿈의 가치를 노래하는 데 헌신해왔다. 그래서 “하류의 퇴적층”에 모인 꿈들이 오래 쌓여서 새로운 지형을 만들 수 있도록, ‘못 박힌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가능주의자다. 또한 그 노래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섞이고 흘러가며 생기는, 저 낮은 곳의 자율지대는 가능주의자들의 영토다. (*)
김지윤(시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