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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Re:Re:이지엽의 현대시 창작 강의 -3.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

작성자賢瑛|작성시간03.09.10|조회수1,250 목록 댓글 0
3.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
가.동일화의 원리
오늘날의 시는 대부분이 서정시다 .다음의 시를 보고 어떠한 창작 원리를 따르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나무 속으로 들어가네.
거기 빽빽한 세월 속에
나를 묻어버리기 위해.

내가 사라진 빈 숲에
푸른 잎들의 울음 메아리 치고
그늘 없는 나의 죽음 나무 속에 있네.
- 채호기의 「나의 죽음」부분

유성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일까. 묵중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구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고객일까. 몹시 추워보였다.
공주에서 온양으로 우회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일까 외로워 보엿다.
온양에서 서울ㄹ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후로 나는 뽑아 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박목월 「나무」


두 작품을 상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작품의 시적 대상은 '나무'다. 그렇지만 이 시적 대상을 형상화하는 방법이 다르다. 채호기의「나의 죽음」은 서정 자아가 나무 속으로 들어가근 것이고, 박목월의 「나무」는 서정자아 속으로 시적대상이 들어오는 것이다. 어디로 어떤 것이 들어갇든 그 둘은 하나가 된다. 세상이 내게로 걸어들어 오거나 내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여기에서 詩가 탄생된다.
이처럼 서정신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추구하는 데 있다.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동일화를 이루는 것은 자아가 세계로 나아가는 것과 세계가 자아 속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를 '투사', 후자를'동화'라고 말한다.
채호기의 「나의 죽음」은 자아가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투사'의 기법을 보여주고, 박목월의 「나무」 는 자아 속으로 세게가 들어오는 '동화'의 기법을 잘 보여 주는 시에 해당된다.
그러나 우리는 전자의 작품이 간단치 않는 사유를 담고 있는 것을 본다. 그 점은 구체적으로 "내가 사라진 빈 숲에/ 푸른 잎들의 울음 메아리치고/ 그늘 없는 나의 죽음 나무 속에 있네." 라는 인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상당히 낯선 인식과 만나게 된다. 나의 죽음은 무엇이고 그늘이 없는 죽음이란 어떤 죽음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인식은 지극히 당연한 사유의 결과에 불과하다. 첫 행 "나무 속으로 들어가네 "에서 이미 예견되어진 것이 있다. 내가 나무 속으로 들어갔으므로 그 숲의 나무3들만 보이는 곳에서 나라는 존재는 이미 없는 것이고 나무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숲은 '빈 숲'이 되고 , 나무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늘' 또한 없는 것이고, 나무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나의 죽음'이 되는 것이다. 이 시가 다소 낯설어 보이고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시 말해 투사가 갖고 있는 속성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투사의 기법에 대해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이 부분의 시인들이나 창작자들은 "나무 속으로 들어가네"라는 인식까지는 쉽게 하면서도 그 다음의 인식을 하는 것에 인색하다. "나무 속으로 들어가네"해놓고서도 나는 정작 들어가지 않고 그 사물의 외연을 읊는데 급급하다면 우리는 온전하게 서정시의 본질을 모르고 있는 셈이 된다. 그만큼 시인들은 자아가 강한 존재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무 속으로 들어가고 , 내가 벽 속을 ㅗ들어가고, 내가 연필 속으로 들어가면 분명 다른 세계가 열린다라는 사실이다. 나무 속에서는 물관부와 수액들의 속삭임이 들리고, 벽 속에서는 빛과 어둠의 양쪽 세계와 끝없는 기다림이 보이고, 연필 속에서는 탄광 막장의 땀방울과 초등학교 시절 짝꿍이 그은 선들이 보인다. 투사는 우리 시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 줄 만한 매력적인 장치임에 틀림없다. 이를 잘 활용해 보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이에 비해 동화는 우리와 훨씬 친숙한 개념이다. 나 중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박목월의 「나무」 는 자아 속으로 시적대상이 들어오는 것이다 . 묵중한, 침울한, 고독한 나무의 모습은 서정자아가 여행지를 옮겨 다니면서 본 각각의 나무들 모습이었다. 이 나무들이 그냥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 속으로 들어와 어떤 실체가 되었을 때 거기에서 詩가 태어난다. 동환느 투사에 비해 자기중심적 사고를 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시인들이 즐겨 쓰는 방법이다. 자아가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 동일화 된다 라는 점은 그만큼 단단한 인식을 만들기에 용이하다.


나무는 몰랐다.
자신이 나무인 줄을
더욱 자기가
하늘의 우주의
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그러나 늦은 가을날
잎이 다 떨어지고
알몸으로 남은 어느날
그는 보았다.
고인 빗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떨고 있는 사람 하나
가지가 모두 현이 되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
하늘 아래
울고 있는 자신을.

-이성선의 「나무」

이 시 역시 나무에 대해 쓰고 있다. 나무가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깨달아 가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나무는 그러나 실체의 나무로만 보여지지 않는다. 나무는 '그'이고 '떨고 있는 사람 하나'다. 더 나아가 "하늘의 우주의/아름다운 악기"라는 것을 운용하는 시인 일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 자신일 수도 있다. "잎이 다 떨어지고/알몸으로 남은""가지가 모두 현이 도어 /온종일 그렇게 조용히/하늘 아래 울고 있는 "의 모습은 아름답게 노래한 시인의 생애와 결코 무관하지가 않다. 그렇다면 이 시는 투사의 기법을 잘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빗방울 하나가
돌멩이 위에 떨어진다
가만히 돌 속으로 걸어가는 비의 혼.
보이지 않는 얼룩 하나, 햇볕 아래
마른 돌멩이 위에서 지워진다.


어디서 왔을까, 네 이름은
내 가슴속에 젖어 물빛 반짝이다가
얼룩처럼 지워져버린 네 이름은.


빗방울 하나가
돌멩이 위에 떨어진다
내 한 생도 세상 속으로 떨어진다.
마른 돌멩이 위에서
내 삶의 한 끝이 가만히 지워진다

-강인한의 「얼룩」


이 시 역시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를 추구하고 있다. 어떠한 방향으로 동일화를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이 작품은 크게 세- 구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빗방울과 돌멩이의 관계다. 빗방울이 돌멩이 위에 떨어진다. 떨어지고 난 뒤 빗방울은 어떻게 되는가. 시인은"가만히 돌 속으로 걸어가는 비의 혼"이라고 말한다. 빗방울이 돌멩이 안으로 동화되며 두 대상이 일체화되고 있는 것이다.)물론 빗방울의 입장에서 보면 투사에 해당된다) 빗방울이 말라 가는 현상을 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했으니 얼마나 흥미로운가. 스며든 후 "보이지 않는 얼룩하나"는 내리쬐는 햇볕 아래의 돌멩이 위에서 가만 지워져 버린다
두 번째는 너와 나의 관계다. 빗방울과 돌멩이의 사물간의 간계가 사람들의 관계로 확대된다. 빗방울은 '너'로 대치되고 돌멩이는'나'로 대치된다. 빗방울이 지워지듯 '너'라는 존재도 내 가슴속에서 지워진다.
세 번째는 나와 세상의 관계다. 빗방울이나 '너'라는 존재가 돌멩이와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듯 결국 '나'라는 존재도 세상 속에서 지워지는 유한한 존재임을 역설 한다. 이 시의 묘미는 사물간의 관계가 인간과 생명의 관계로 자연스럽게 발전되고 있다는데 있다.이 작품은 세 개 서로 다른 관계 속에 설정된 자아와 세계화의 동일화로 이루어진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나. 순간과 압축성
서정시는 순간적인 장르다. 산문은 축적의 원리를 따르지만 시는 압축의 원리를 따른다. 탑을 쌓아가듯이 쓰는 것이 산문이라면 시는 다 사용한 캔을 프레스기로 압축한 것이 시다. 그러므로 시는 대단히 경제적인 장르다. 시가 짧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시는 점점 짧아지는 것을 선호하는 방법으로 나아가고 있다. 장르사를 통해서도 이것은 쉽게 증명이 된다.


달이 빈방으로 넘어와

누추한 생애를 속속들이 비춥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속옷처럼

개켜서 횃대에 겁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입니다 대쪽같은 임강빈 선생님이

죄 많다고 말씀하시고 누가 엿들었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입니다 죄 많다고

고백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얼굴이 겨울 바람처럼

우우우우 대숲으로 빠져나가는 정경이 보입니다

모든 진상이 너무도 명백합니다

나는 눈을 감을 수도 없습니다

-최하림의 「달이 빈방으로」전문

여름 땡볕 맹렬하던 노래
늦은 홍수 지고
노랗게 야윈 상수리 잎 사이
맴 맴 맴 맴 맘 맘 맘 밈 밈 몸 믐 ㅁ -
사그라든다
땅속 십 년을 견디고
딱 보름쯤 암컷을 부르다가
아무 회답이 없자
아무 미련이 없자
툭 몸을 떨구는 수매미 한 마리

새야 바람아 찬 냇물아
지지솔솔
씽씽짹짹
이제 너희가 지저귈 차례다.
- 최영철의 「매미」전문

「달이 빈방으로」에는 공간의 현재성이 생생하게 잘 드러나 있다. 달이 빈방으로 들어와 비추는 모습이 눈에 보일 듯이 선명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가는 실밥도 역력히 보"이고"누가 였들었을라, 막 뒤로 숨는 모습도 보"인다. 얼마나 선명하면 "고백하는 이들의 부끄러운 얼굴"들이 "겨울바람처럼 우우우우우 대숲으로 빠져나가는 정경이 보"인다 라고 했을까. "모든 진상이 너무도 명백"하고 "눈을 감을 수도 없"는 현재성이 서정시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도 현재형으로 쓰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생생한 현장성은 시의 긴장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런데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서워 과거형으로 시를 창작하다보면 현재형으로 쓰는 것이 잘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아무 생각없이 과거형으로 시를 창작하는 많은 시인들이 있다. 되도록 현재형으로 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최영철의 「매미」역시 서정시의 현재적 장르 속성을 잘 살려 쓴 작품이다.
1950년 한국전쟁에 참가한 이영순의 『연희고지(延禧高地)』는 현재성이 아주 극명하게 드러난 시집이다. 시집 연희고지(延禧高地)』는 전쟁 현장의 숨막히는 순간과 치열함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여기에는 장시 長詩 연희고지(延禧高地)』와 「지령 地靈」이 실려 있다. 『연희고지(延禧高地)』(1951 .9月作)는 서울 환전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던 서울 수복작전에 참가한 시인의 실제 경험이 생생하게 연희고지에서 이화고지를 거쳐 아현 터널 서대문지구에 이르기까지 묘사되고 있다. 삼형제가 전투에 참여했다가 혼자 살아 남은 시인의 눈을통해 머리 끝 하나 들먹일 수 없는 필사의 항전만이 숨 가쁘게 직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뒤를 연달아 진격한는 海兵들은
부상한 우리 둘은 볼틈도 없이
우리 둘의 머리 위를 뛰어 넘어서
2 .3미터 前方의
지금까지 敵兵이 있다 물러간 塹壕 속으로
거울에 부닥치는 햇살같이 뛰어든다
그럴적 마다 몇 개의 流彈이
그 작은 城壁에 콱콱 박히며
뽀얀 먼지를 연기처럼 피우므로
머리끝 하나 들먹일 수도 없다.
292高地로부터 내갈기는
敵 기관포의 무서운 集中彈은
塹壕斷面의 홍토를 갈 듯 쑤셔대고
바윗돌을 탁탁 깨뜨리고
소나무를 툭툭 동강내면서
무시무시한 죽음의 폭풍을 일으킨다.
-연희고지 부분

아차 또 어디서 殞命하는지
저 아래 언덕길을
분주히 달려가는 救急隊
서로 나는 彈丸들이
夜玉緞의 바단을 짜듯
火焰
光彩
爆音
暴風과 함께
콩콩, 우수수 땅을 덮치는
돌멩이 흙덩이 소리

- 연희고지 부분

마치 스치듯이 넘어가는 스냅 사진처럼 명료한 표현들이 박진감 있게 전개 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전쟁 상황에서 오게 되는 허무주의나 패배 의식등 전쟁의 존재 의미와 질문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적군은 단지 적군일 뿐이며 하나의 가치조차 부여할 수 없는 증오의 대상일 뿐이다. 오직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만이 존재하게 된다. (사실 이 점은 현재적 장르의 단점과도 연계된다. 생각이 겹무늬를 가질 수 없고 단순한 직선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형을 쓰는 것 보다는 현재형을 씀으로써 얻는 장점이 많다고 우선 이해하면 좋겠다. 적어도 어떤 시제를 쓰더라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고 판단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서정시는 또한 압축의 장르다. 사건의 전말을 따져 그 원인과 결과를 밝히지 않고 단지 인상적인 한 부분만을 그려 낼 수도 있다. 회하림의 위 인용시도 달이 비치는 빈 방의 감각적인 인상의 한 부분만을 화폭에 담았다. 최영철의 매미 또한 마찬가지다. 매미가 땅 속에서 십 년 동안을 견디는 세월은 단 한줄로 가능하다. 그렇지만 매미가 우는 소리인 맴 맴 맴 맴 맘 맘 맘 밈 밈 몸 믐 ㅁ -"은 십년의 세월보다 더 길게 할애를 하고 있다. 시간의 길이와 시행의 길이는 같이 가지 않는다. 백 년이나 천 년을 한 단어로도 축약할 수 있고 아주 순간적인 부분을 수십 행으로도 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축적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압축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라는 점이다. 압축은 더 이상 줄여지지 않는 길이를 전제로 한다.
압축의 원리를 가장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던 시인이 이동주다 . 그의 시는 80%이상이 시의 한 연이 두행을 벗어나지 않고, 시의 한 행은 2음보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동주는 ⑴의도적인 언어의 절제를 통해 감성적인 욕구를 효과적으로 制御하고 모색하면서,⑵시에 음악성을 부여하여 민족 고유 정서의 질박한 면을 최대한 살리고자 하였다. 그가 얼마만큼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는 행 배치와 축약된 시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여울에 몰린 은어떼

가아응 가아응 수우월래에


목을 빼면 설움이 솟고...
白薔薇 밭에
孔雀이 醉했다.


뛰자 뛰자 뛰어나보자
강강술래


뇌누리에 테프가 감긴다.
열발 상모가 마구 돈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갈대가 스러진다.
旗幅이 찢어 진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 강강술래 - 전문

이 작품이 改作을 거친 과정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인용된 강강술래는 1979년 시집『散調』에서 옮겨 적은 것인데 1961년 『한국전후문제시집』에는 1연과 2연 사이에 "삐비꽃 손들이 둘레를 짜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가 삽입되어 있고 8연이 "旗幅이 찢어진다/갈대가 스러진다"로 되어 있다 왜 그랬을까.
먼저 61년찬에 문제의 한 연을 삽입한 것과 8연이 앞뒤 行이 바뀌어 改作된 이유는 이렇게 설명 될 수 있다. '강강술래'라는 민족 고유의 풍속을 묘사할 때 삐비꽃의 연상은 그리 이상스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풀은 남부지방에서는 흔한 풀 중의 하나이고 시골에 살았다면 추억이 담길만한 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춤추는 모습이 삐비꽃이 무리 지어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양을 강강 술래의 모습과 클로즈업 시켰다고 해도 좋고 그 삐비꽃을 꺾어 씹던 어린 시절을 한 번씩은 겪어온 마을 아낙네들이 모여 춤을 춘다고 해도 좋다 .아무튼 유사한 의미를 강강술래와 연관시켜 1연 '여울에 몰린 은어 떼'가 너무 함축적인 표현이라는 생각 하에 좀더 이를 구체화시키고자 의도적으로 삽입했을 것이다. 8연이 앞 뒤 행이 바뀐 것은 그 춤동작과 분명 관련이 있다.
곧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이고 이 노래와 춤의 진행이 어떠한가에 더 중점을 두게 된 것이다. 본래의 작품의 시작은'여우에 몰린 은어떼'로서 여기저기서 아낙네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고 그래서 이들이 모인 느린 템포로 노래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물론 처음은 춤이 주가 되지 못한다. '목을 빼는 설움'이 섞인 노래가 먼저인 것이다 그렇다면 1연과 2연에다 삽입했던 한 연은 자연스러운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에서 그렇게 느리지 않는 듯한 춤이 먼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삐비꽃'에서 연상되는 적절한 소재의 적절한 표현이라도 그는 과감히 삭제한 것이다. 8연에도 거의 같은 이유에서이다. 시 '강강술래'에서 춤이 가장 절정에 달한 대목은 바로 8연이고 8연중에서도 뒤 행 "기폭이 찢어진다"에 있다. 그러기에 당연히 9행의 노래도 '가응강'이 아니라 빠른 템포의 '강강'인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의 개작과정을 유추해보면서 시에 있어서 한 단어 놓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얼마나 고도의 축약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는 축약된 언어가 갖는 무미 건조성을 극복하기 위해 율동적인 음악성까지를 주도 면밀하게 검토하였던 것이다.
시는 고도로 축약된 언어로 짜여져야 한다. 이동주가 주장한 다음의 시관을 보자.

모든 藝術이 다 그렇듯이 詩도 표현이 있고서야 성립된다.
표현 이전의 시는 놓쳐버린 구슬이요 아까운 生命의 遺産이다.
다만 詩의 特質은 짧은 형식에 있다.
지극히 制限된 規格에 있나니, 詩人의 苦行은 실로 이 제한된
格式에 있으리라.

그는 '짧은 형식' '제한된 규격'에 대해 일률적으로 고정된 형태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되도록이면 적어지기를 主張하면서 아주 없어지기를 두려워하는" 그 오묘함을 시의 특질로 보았던 것이다. 시가 길어진다는 것 자체를 본질에서 어긋나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이를테면 아주 경제적인 시관을 가진 셈이다. 시'뜰'은 그의 경제적인 시관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고이 쓸어 논 뜰 위에
꽃잎이 떴다.


당신의 신발
동정보다는 눈이 부신
미닫이 안에
나의 반달은 숨어...

앞 연과 뒤 연을 건너 뛰면서 '당신의 신발'이라는 극도의 절제된 언어로써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의 시선을 집중 시키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짧게 처리해 한 연을 ㅗ배치해도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본 것이다. 인용된 시에서 2연이 갖는 역할은 2연을 삭제하고 보면 확연해진다. 서정자아의 시선은 뜰 - 방안으로 가게 되며 무슨 내용을 얘기하자는 것인지가 분명하지못하게 된다. 2연으로 삽입됨으로써 뜰 - 신발 -신발의 주인 (나의 반달). 방안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된다. 그의 언어 절제에 대한 노력은 이렇듯 1行이라도 허술하게 배치하지 않고 관심을 집중시켜 그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 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다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 김지하,「생명」전문

김지하의 「생명」은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우는 것" 하나에 모든 시선이 집중된다. 이 생명의 원행은 억지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있다. 어미가 왜 우는지 그 전후는 생략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마지막 자리"라는 점이다.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허용치 않는다.

시 창작에 있어서 이점은 매우 중요한 창작원리를 제공한다. 오늘날의 시가 난삽해지고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인 자신도 모르는 사유를 시속에 다 집어넣으려는 욕심에서 기인되고 있다. 한편의 시를 쓰고 나서 그 단어나 구절이나 혹은 행과 연이 이 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인가를 점검해보자. 점검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 단어나 구절, 행과 연을 건너뛰면서 율독 해 보면 된다. 자연스레 넘어간다면 열 중 아홉은 건너뛰어도 되는 부문을 삭제시켜야 한다. 끊어낸 자리의 빈 공간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의 몫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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