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의 「토막말」 감상 / 이병률
토막말
정 양 (1942~ )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시집 『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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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오프닝 멘트는 온통 날씨 이야기만 한다. 가을이 왔다는 이야기. 호젓이 가을을 맞고 싶지만 타인의 극성스러운 감각도 문득 고맙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을이라지 않는가.
요 며칠 가을이 오면 무얼 할까 생각했다. ‘무얼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무너져 내릴까’라는 생각을 한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시인은 그렇게 살면서 몇 줄을 건져 올리는지도 모른다. 찬란도 좋지만, 허무도 좋다. 포근함도 좋지만, 한기도 좋다. 정양 시인의 「토막말」이라는 시처럼 바닷가에서나 아니면 어느 단풍 드는 나무 밑에서 욕 한 사발 부려놓으면 어떨까. 얼마나 보고 싶으면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아무 곳에나 적어놓을까.
남프랑스의 도시 몽펠리에의 작은 공원을 걸을 때였다. 산책로 주변에 서 있는 큰 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 사이의 빈틈에 사람들이 꽤 많은 종이를 접어 꽂아둔 게 보여서였다. 이 나무가 독특한 사연이나 전설을 갖고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그냥 이 나무와 똑같이 생긴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을 뿐 특별한 표지(標識)가 보이지는 않았다. 누가 제일 먼저 이 나무에다 사연을 적어 꽂아뒀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정양 시인의 시 한줄처럼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같은 글귀가 꽂혀 있을지도 모른다. 공원에 사람이 없어 몰래 사연을 하나 펴보고 싶었지만 나도 괜스레 종이에 뭔가를 적을 것 같아 마음을 접고 돌아섰다.
“가을입니다. 가을이어서 보고 싶습니다.”
이 가을을 여는 나의 오프닝 멘트는 이렇다.
이병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