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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자작시 해설] 지상의 봄 / 강인한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3.03.17|조회수318 목록 댓글 1
[자작시 해설] 지상의 봄 강인한
 
 
지상(地上)의 봄
 
 
별이 아름다운 건
걸어야 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부서지고 망가지는 것들 위에
다시 집을 짓는
이 지상에서

보도블록 깨어진 틈새로
어린 쑥잎이 돋아나고
언덕배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허물어진 집터에
밤이 내리면
집 없이 떠도는 자의 슬픔이
이슬로 빛나는 거기

고층 건물의 음흉한 꿈을 안고
거대한 굴삭기 한 대
짐승처럼 잠들어 있어도

별이 아름다운 건
아직 피어야 할 꽃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시》 1991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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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잃고 떠도는 이의 슬픔
 
 
   철들며 우리 집이 없이 산다는 것, 집 없는 설움, 그 막막한 설움을 느낀 시기에 내 소년 시절은 거기서 끝났다. 초등학교 5학년이 끝나갈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석초등학교 5학년 소년이 살던 그 마지막 집을 기억한다. 광주시 서석동 당산나무 골목. 집 앞의 골목으로 나가면 남동 성당이 나오던가 그랬다. 지금도 기억은 선명한데 결혼하고 한참 지난 삼십대 중반부터 삼십 년을 광주에 내리 살면서도 옛 집터 근방을 정확하게 찾아내지를 못했다. 사세청(국세청) 관사였는데…. 이후 집이 없는 것과 아버지의 부재는 동전의 앞이며 뒤와 같은 의미였다. 아버지가 우리 집이었다.
   노태우 정부 시대의 몇 해를 살았던 광주시 북구 용봉동 147-14번지. 전남대 후문 쪽의 골목에 위치한 대지 33평에 지어진 집이었다. 그래도 내 집이라고 문패를 붙이고 살았고, 현관 밖에 애완견도 길렀다.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하기 위해 큰길로 나설 때 허물고 있는 집을 보았다. 포클레인으로 낡은 벽을 철거하고 더 깊이 땅을 파는 작업 현장을 몇날 며칠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 자리엔 최소한 사오층의 건물이 가난한 이의 꿈을 허물고 들어설 것 같았다. 허물어진 집의 주인이 그 자리에 새로운 빌딩을 짓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집을 잃고 떠도는 이의 슬픔이 풀꽃에 맺히는 새벽이슬로 빛날 것이었다. 그럴지라도 나는 이 지상에 봄이 오면 비록 멀리 있는 별빛은 슬픈 사람들의 앞날과 소망을 비춰 주리라 믿고 싶었다. 슬픈 사람들을 말없이 비춰주는 별은 그렇게 아름다운 존재였다.
   이 시는 1990년 4월에 썼고, 시집 『칼레의 시민들』에 수록한 작품. 해설도 몇 달이나 늑장부리며 늦게 써준 평론가가 그나마 이 작품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버린 것이 나는 못내 유감스러웠다.  _강인한
 
 
[감상]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인간의 말에는 주관적인 감정의 측면과 객관적인 인지의 측면이 언제나 맞물려 있게 마련이다. 특히 말을 전문적으로 가지고 노는 재주를 지닌 시인들의 시적 표현들을 살펴보면 그 말들의 표정이 아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시인이 감정 혹은 정서의 표현에 기울어 있는가 하면, 어떤 시인은 보다 인지의 표현으로 기울어 있다. 그리고 그 기울기에 있어서도 표정과 음영은 미묘하게 각기 다르다. 이와 같이 시적 표현이 감정과 인지의 양극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삶이 주체와 세계, 주관적 객관 등 이원적인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정서의 내용에서 오는 것이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을 듯하다. 왜냐 하면 윌리엄 제임스의 견해에 의하면 정서는 감정의 영역과 인지의 영역을 다 같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흔히 말하듯이 시가 정서의 표현이라면, 그 시적 언어는 언제나 감정 혹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정서의 표현이거나 인지의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그 양극의 기울기는 시적 개성의 표정에 해당할 것이다. 
    강인한의 「지상의 봄」은 감정의 영역과 인지의 영역이 아주 드물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예이다. 사람의 인지작용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좀 더 복잡한 사유의 궤적을 그리는 것인데, 이 시는 사유의 통로를 지나서 세계를 해석하고 드러내되 관념의 늪에 빠지지 않고, 감정을 표현하되 이른바 객관적인 상관물을 통하여 드러내는 절제의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첫 연과 마지막 연의 간결하고 단정적인 어조는 그 외양과는 달리 격정을 어렵사리 안으로 다독여 놓은 뒤의 것이다. 그리고 3연의 담담한 묘사도 짐짓 무심한 듯이 보이지만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감정과 인지의 균형, 군더더기 없는 생략의 묘, 절제된 감정과 적확한 조사, 이 모든 것들이 이 시가 지닌 투명한 아름다움에 공헌하고 있다.


  김영석(시인)



    강인한의 「지상의 봄」에서는 시인의 미래지향적인 열린 마음이 부서지고 망가진 땅 위에 어린 쑥잎과 바람보다 더 푸른 토끼풀로 봄을 가져다 놓고 있다. 풀 중에서도 비무장이고 평화적인 상징 같은 토끼풀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이나, 희망과 화해와 부활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봄을 내세우고 있는 점에 시인의 건강성이 돋보인다.
   시인은 답을 주는 사람이기보다 언제나 문제를 제기하는 쪽에 서는 사람이지만, 때로 잠수함의 토끼처럼 경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무게만큼 혹은 그보다 더 크게 희망의 메시지를 얹어 놓는 것도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란 끊임없는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의지는 또한 참 인간다움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과거보다는 내일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희망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건강성이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권택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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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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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tiger0 | 작성시간 23.03.17 '땅을 샀다'와 '지상의 봄'을 읽으며 아직 피어야할 꽃을 생각하며 평화로운 마음을 반깁니다.
    오늘도 감사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시를 안고 새김합니다.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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