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연의「반건조 살구」감상 / 임종명
반건조 살구
안희연(1986~)
버리러 다녀왔습니다
꼭지를 떠나려면 결심이 필요하니까요
떨어져 봐야 흙바닥인 삶이지만
아픔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버릴 땐 큰 것 위주로 버립니다
휑한 느낌이 좋아서요
속에 뭐가 많은 봄날이에요
나 하나로도 버겁다는 뜻입니다
이 집에 나와 간장 종지만 남은 사연입니다
누가 더 옹졸한가 겨루는 대국입니다
바둑에서는 하수가 흑을 잡는다면서요
양보합니다, 이 집엔 결국 간장 종지가 남을 거예요
그리울까요 가지 끝에 매달린
요람을 흔들어 주던 바람
밤과 나의 은밀한 결속이었던
달빛 실금들
언젠가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저를 만난다면
흙은 살살 털어 주세요
처음은 텁텁하고 떫은 법이잖아요
시간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신맛보단 단맛이 강해질 테죠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쫀득해질 거예요
위안이 있다면
받을 땐 한 다발이었던 꽃들도
죽을 땐 송이송이라는 것
알맹이 알맹이 느리게 오는 아침을 맞아요
미래요? 놓일 수 있는 식탁은 광활합니다
살구의 색감은 살구만이 낼 수 있습니다
식탁보로 속이지 않은 식탁을 원해요
— 사이버문학광장 《웹진 문장》202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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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건조 식품이 시중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 반건조 처리는 장기 보관을 위해서지만 그 식품의 원료들은 대개 땅에 떨어지거나 벌레나 새에 먹혀 흠집 난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들이다. 한마디로 약자다.
이 시의 화자도 땅에 떨어져 반건조 처리에 들기 전의 살구 열매다. 그런데 살구가 능동적이다. 외부에 의해 떨어지지 않고 스스로 "버리러 다녀"오고, "꼭지를 떠"난다. 게다가 "휑한 느낌이 좋아서" "큰 것 위주로 버"린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자신을 "만난다면/ 흙을 살살 털어주"라고 주문한다. 떨어질 때는 "텁텁하고 떫"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신맛보다 단맛이 강해"지고"쫀득해질 거"니까 함부로 다루지 말아 달라는 부탁일 게다. 그래서 아침을 맞아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살구만의 색감으로 미래의 광활한 식탁에 올려지고 싶어한다. 존재감을 알리고 싶어하는 약자의 간절함을 이 시에서 본다.
3연에서 나(살구)와 간장 종지가 남아 서로 겨루고, 살구가 양보해서 결국 간장 종지만 남을 거라는 이야기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간장 종지가 집안 살림을 의미하는 은유로 사용하지 않았나 추정할 뿐이다.
임종명(전 한국일보 기자, 네이버 블로거 ‘숲속의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