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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김현의 「겨울바람」 감상 / 박소란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3.12.28|조회수392 목록 댓글 1

김현의 겨울바람」 감상 박소란

 

 

겨울바람

 

   김 현

 

 

겨울바람이 분다

아직 가을이 오지 않았는데

자연보다 앞서는 마음이란 것도 있으니까

 

그 마음 때문에

겨울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이야 흔하디흔하니까

 

왜 그럴 때 있잖아

쓸쓸한 개 한 마리가 늦은 오후에

이유 없이 창밖을 향해

활활

짖는 것을 보면 도망치고 싶은 거

단란한 살림을 버리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잊히고 싶은 거

한 사람을 애달게 하고 싶은 거

그 모질게 뜨거운 바람에 제각각 이름을 붙이지만

겨울바람이지 부는 바람이지

 

그런데 어쩐 일일까

구 월 십사 일 수요일 오후 다섯 시

빌딩 이층에서 듣네

겨울바람 부는 소리

 

이 콘크리트 건물에는 개 한 마리 없는데

개처럼 구는 사람은 있어

바로 나지

너이기도 하지

화르르 화르르 겨울바람 부는 소리

불타는 소리

어떤 사람은 그을리는 중이네

그럴 만도 해 그 사람은

남을 태울 수 없어서 자기를 태우는 거

당신도 해 봤을 텐데 그러니까

일주일 전쯤에

혼자 앉아 왜 이러고 사는가

창밖을 향해

매번 버림만 받다가

불어 오지 그때 바람은

 

겨울바람이 분다

지금

그래 지금

당신에게로 내가

불타는 혀를 보낸다면

 

받아 줄래

나는 당신뿐이야

개처럼 군다 겨울바람이

 

         —시집 『장송행진곡』 2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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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속에는 아직 겨울이 오지 않은 모양이다. 아마도 늦여름 즈음? 그러나 지금 여기는 벌써 겨울이고, 12월이고, 한 해의 끝이고. 그러니 겨울바람이 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마음에 세찬 바람이 분다고, 혼잣말처럼 웅얼거린다 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화르르 화르르 겨울바람 부는 소리 불타는 소리”. 남을 태울 수 없어 자신을 태우는 사람의 소리. 타오르는 마음에 바람이 불고, 그 바람에는 분명 각각의 이름이 있을 테지만 지금은 그냥 “겨울바람”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잊히고 싶은 마음. 그 바람.

   어제오늘 창밖에는 눈이 왔다 비가 왔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끊이지 않아 자꾸만 창쪽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 모습을 바깥의 누군가 보았다면 얼핏 쓸쓸한 사람 하나 저 속에서 “활활” 소리치고 있다고, 그렇게 여겼을지도.

 

 박소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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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기준 | 작성시간 23.12.29 고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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