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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최휘의 「난, 여름」 감상 / 고광식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4.10.24|조회수290 목록 댓글 0

최휘의 여름」 감상 고광식

 

 

여름

 

   최 휘

 

  

비단뱀이 울창한 여름 나무 아래를

리리리 리리리리 기어간다

 

피자두가 주렁주렁 열린 자두나무 아래를 기어가며

열흘은 지나야 먹을 수 있대

라고 한다

 

자둣빛 구름 사이로 멀어진 마음이

두 줄의 비행운으로 지나간다

참 속상했겠다

지나간 날들을 쓱쓱 핥아 주는 바람 같은 말

 

청포도 참외 토마토 오이 감자 옥수수

함께했던 여름들이 지천이다

 

여름의 가장자리를 밟으며 뙤약볕 아래를 누비며

아 더워라고 말하면

들은 듯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이제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차라리 나를 사랑해 버렸어

여름

이렇게 말할 거다

 

.......................................................................................................................

 

    「여름의 시적 화자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울창한 여름 나무 아래를 기어가는 한 마리 비단뱀을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본다그런데 관찰자 시점이지만비단뱀을 화자로 보게 하는 특이한 시점의 시이다랭보가 말한 것처럼 화자는 미지의 것에 도달하기 위해 기어간다현실에 매몰되어 재현에 몰두하지 않고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한다그 행위가 리리리 리리리리의 음악성으로 경쾌하다시적 화자는 열흘은 지나야 먹을 수 있대처럼 아직 오지 않은 소유를 받아들인다따라서 먹을 수 없는 현실을 넘어서 먹을 수 있는 미래를 지향한다특이한 시각으로 꿈꾸듯 자둣빛 구름 사이로 멀어진 마음이/두 줄의 비행운으로 지나간다와 같은 초월의 이미지를 만든다거짓 낡은 이미지로 비칠 것 같은 청포도 참외 토마토 오이 감자 옥수수의 열거식 표현들이 이 시에선 오히려 새롭다왜 그럴까그것은 최휘 시인이 첫 행부터 현실을 비틀어 버렸기 때문이다또 다른 자아의 신비로운 지향점은 결국 여름에 도달한다최휘 시인의 시적 화자는 자연과 일체가 되어 가장 지고한 자로 거듭난다여름은 우리말의 결과 정서를 잘 살려낸 시이다최휘 시인의 다루는 말의 감각은 우리 시의 새로운 서정성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최휘의 시는 현실을 지우며 시적 진실을 마음껏 상상하게 만든다.

 

        —《포엠피플》 2024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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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식 / 1990년 민족과문학으로 시,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등단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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