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휘의 「난, 여름」 감상 / 고광식
난, 여름
최 휘
비단뱀이 울창한 여름 나무 아래를
리리리 리리리리 기어간다
피자두가 주렁주렁 열린 자두나무 아래를 기어가며
열흘은 지나야 먹을 수 있대
라고 한다
자둣빛 구름 사이로 멀어진 마음이
두 줄의 비행운으로 지나간다
참 속상했겠다
지나간 날들을 쓱쓱 핥아 주는 바람 같은 말
청포도 참외 토마토 오이 감자 옥수수
함께했던 여름들이 지천이다
여름의 가장자리를 밟으며 뙤약볕 아래를 누비며
아 더워, 라고 말하면
들은 듯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이제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차라리 나를 사랑해 버렸어
난, 여름
이렇게 말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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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름」의 시적 화자는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울창한 여름 나무 아래를 기어가는 한 마리 비단뱀을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관찰자 시점이지만, 비단뱀을 화자로 보게 하는 특이한 시점의 시이다. 랭보가 말한 것처럼 화자는 미지의 것에 도달하기 위해 기어간다. 현실에 매몰되어 재현에 몰두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한다. 그 행위가 “리리리 리리리리”의 음악성으로 경쾌하다. 시적 화자는 “열흘은 지나야 먹을 수 있대”처럼 아직 오지 않은 소유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먹을 수 없는 현실을 넘어서 먹을 수 있는 미래를 지향한다. 특이한 시각으로 꿈꾸듯 “자둣빛 구름 사이로 멀어진 마음이/두 줄의 비행운으로 지나간다”와 같은 초월의 이미지를 만든다. 거짓 낡은 이미지로 비칠 것 같은 “청포도 참외 토마토 오이 감자 옥수수”의 열거식 표현들이 이 시에선 오히려 새롭다. 왜 그럴까? 그것은 최휘 시인이 첫 행부터 현실을 비틀어 버렸기 때문이다. 또 다른 자아의 신비로운 지향점은 결국 “난, 여름”에 도달한다. 최휘 시인의 시적 화자는 자연과 일체가 되어 가장 지고한 자로 거듭난다. 「난, 여름」은 우리말의 결과 정서를 잘 살려낸 시이다. 최휘 시인의 다루는 말의 감각은 우리 시의 새로운 서정성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최휘의 시는 현실을 지우며 시적 진실을 마음껏 상상하게 만든다.
—《포엠피플》 2024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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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식 / 1990년 《민족과문학》으로 시,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학평론 등단. 시집 『외계 행성 사과밭』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