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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김수영의 「엔카운터誌」 감상 / 강인한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5.02.14|조회수387 목록 댓글 0

김수영의 엔카운터誌」  감상 / 강인한

 

엔카운터

 

   金洙暎

 

 

빌려드릴 수 없어. 작년하고도 또 틀려.

눈에 보여. 냉면집 간판 밑으로 육개장을 먹으러

들어갔다가 나왔어모밀국수 전문집으로 갔지

매춘부 젊은애들, 때묻은 발을 꼬고 앉아서

유부우동을 먹고 있는 것을 보다가 생각한 것

아냐. 그때는 빌려드리려고 했어. 寬容의 미덕

그걸 할 수 있었어. 그것도 눈에 보였어. 엔카운터

속의 이오네스꼬까지도 희생할 수 있었어. 그게

무어란 말이야. 나는 그 이전에 있었어. 내 몸. 빛나는

.

 

그렇게 매일 믿어왔어. 방을 이사를 했지.

방에는 아들놈이 가고 나는 식모아이가 쓰던 방으로

가고, 그런데 큰놈의 방에 같이 있는 가정교사가 내

기침소리를 싫어해. 내가 붓을 놓는 것까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까지 문을 여는 것까지 알고

防禦作戰을 써. 그래서 안방으로 다시 오고, 내가

있던 기침소리가 가정교사에게 들리는 방은 도로

식모아이한테 주었지. 그때까지도 의심하지 않았어.

책을 빌려드리겠다고. 나의 모든 프라이드를

재산을 연장을 내드리겠다고.

 

그렇게 매일 믿어왔는데, 갑자기 변했어.

왜 변했을까. 이게 문제야. 이게 내 고민야.

지금도 빌려줄 수는 있어. 그렇지만 안 빌려줄 수도

있어. 그러나 너무 재촉하지 마라. 이 문제가 해결

되기까지 기다려봐. 지금은 안 빌려주기로 하고

있는 시간야. 그래야 시간을 알겠어. 나는 지금 시간

과 싸우고 있는 거야. 시간이 있었어. 안 빌려주

게 됐다. 시간야. 시간을 느꼈기 때문야. 시간이

좋았기 때문야.

 

시간은 내 목숨야. 어제하고는 틀려졌어. 틀려

졌다는 것을 알았어. 틀려져야겠다는 것을 알

았어. 그것을 당신한테 알릴 필요가 있어. 그것

이 책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모르지. 그것을

이제부터 당신한테 알리면서 살아야겠어그게

될까? 되면? 안되면? 당신! 당신이 빛 난다.

우리들은 빛 나지 않는다. 어제도 빛 나지 않고,

오늘도 빛 나지 않는다. 그 연관만이 빛 난다.

시간만이 빛 난다. 시간의 인식만이 빛 난다.

빌려주지 않겠다.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빌려주지 않겠다. 야한 선언을

하지 않고 우물쭈물 내일을 지내고

모레를 지내는 것은 내가 약한 탓이다.

야한 선언은 안해도 된다. 거짓말을 해도

된다.

 

안 빌려주어도 넉넉하다. 나도 넉넉하고,

당신도 넉넉하다. 이게 세상이다.

 

         <1966.4.5>

 

계간 《한국문학》1966 가을호, (현암사 발행) 

 

...............................................................................................................................

 

김수영 시인이 김재원 시인의 시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가 발표되기 전 196645일에 초고를 썼다고 밝힌 시.

 

책 한 권 당신에게 빌려주는 건 간단한 일이다. 언제 만나서 줄 것인지, 그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만나서 주면 된다. 하지만 그게 서로 시간이 맞아야 한다. 피차의 사정이 간단치가 않다. 단행본이건 잡지건 책을 빌려주는 일, 여기엔 사개가 딱 맞는 시공간이 연관되어야 한다. 어느 날 몇 시,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사무적으로 우편 처리한다는 건 빌려주는 행위로 생각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당신과 나, 두 사람이 만나 손으로 건네주고, 받는 행위로서 빌려줌과 빌림이 성립된다. 그러므로 단순한 일이건만 간단치 않음이 진실이다. 당연히 여기엔 시간이 적잖이 소요되고 두 사람에게 마땅한 장소가 물색되어야 한다. 골치 아픈 문제는 당신과 내가 공동으로 인식하는, 맞아 떨어져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은 김수영 시인의 입관을 할 때, 미망인 김현경 여사가 그의 관에 넣어준 것은 하이데거의 책 존재와 시간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엔카운터誌란 시에서 시인은 당신에게 책을 빌려주느냐 마느냐 시시한 갈등 속에서 목숨 같은 실존적 시간을 자각한다. 시인은 비루한 일상 속에서도 빛나는 시간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적 인식이 강했다. 시작 완성의 날짜를 원고 끝마다 꼬박꼬박 적어놓은 것처럼.

 

   강인한

 

                              *

 

엔카운터(Encounter) : 1953년 창간된 문화자유회의(Cultural Freedom 반공주의 지식인들의 국제적 조직)의 영국 지부 기관지. 《엔카운터》를 둘러싼 냉전 문화 사업의 영향은 시인 김수영에게까지 미쳤다. 유럽에 본부를 두고 있던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아시아 각국의 공공기관 및 언론사에도 《엔카운터》 1년 구독권을 증정하고 있었다. 아시아의 지식인들에게 이 잡지와 문화자유회의에 대한 인지도를 끌어올리려는 의도였다. 문화자유회의에 그 대상자를 추천하고 잡지 구독 경비를 지원한 것은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미국의 민간 기구 아시아재단(The Asia Foundation)이었지만 나중에 그 배후에 CIA가 개재되었음이 드러났고 1967년 종간되었다. 유럽에 본부를 두고 있던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아시아 각국의 공공기관 및 언론사에도 《엔카운터》 1년 구독권을 증정하고 있었다.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마티스, 세잔, 쇠라, 샤갈, 칸딘스키 등 초기 모더니즘 대가의 전시회라든가 잭슨 폴록의 추상 예술을 지원했다. 엘리엇의 「황무지」,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체호프와 톨스토이 작품 등 1천종이 넘는 서구 고전의 번역에도 CIA가 문화 전쟁의 차원에서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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