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의 「그림에서 빠져나온 마하」 평설 / 서안나
1808년 5월 3일, 프란시스 고야
그림에서 빠져나온 마하
강인한
고소한 옥수수 또르띠야가 생각나요.
맛있는 하몽을 싼 또르띠야에 적포도주도 한 잔.
배경을 떨치고 살금살금 액자 틀을 뛰어내려 사뿐,
마요르 광장에 나갈 테니 눈감아주셔요.
비어 있는 액자 앞에서 구시렁거리는 사람들이야
나체의 체온 희미한 장의자에
페르시아고양이처럼 드러누워 쉬든지 말든지.
나도 그림 밖의 세상에서
다디단 공기를 숨 쉬고 맨발로 달리고 싶어요.
랄랄라 트랄라라 캐스터네츠 튕기며 멋진 춤을 추고 싶어요,
올레! 멀리 있는 별빛 그리운 말라게니아.
내 얼굴에 환희의 금실 은실 햇살을 받고 싶어서
방금 프라도 미술관을 빠져나온 길이에요.
프릴 많이 달린 플라멩코 무용복이 실은 좀 더러운가요.
미술관 회랑에서 빠져나온 걸 아무도 몰라요.
날마다 테레빈유 마시며 가슴이 먹먹했어요.
날마다 1808년 5월 3일, 검은 밤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날마다 총소리, 총소리, 그리고 높이 팔 벌린 검은 비명소리
강물처럼 침대 밑으로 흐르고
제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피 묻은 아가리,
끔찍한 시간의 검은 괴물이 쫓아오고 있어요.
동트는 핏빛
아, 이제는 돌아가야 해요.
돌아가서 당신을 기다릴게요. 목 뒤로 손깍지 끼고
어둠 속에 빛나는 가슴 열어 한 송이 백합처럼
기다릴게요. 어서 오셔요.
두려움 없이 보셔요, 온몸으로 기다리는 내 모습을.
시집 『튤립이 보내온 것들』 2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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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스페인 화가 고야의 작품 「옷 벗은 마하」를 소재로 삼고 있다. 미적 대상이자 응시의 대상이었던 그림 속의 마하를 발화 주체로 호출하고 있다. 그녀가 겪는 고통의 정체를 통해 예술 작품 내부에 봉인된 기억과 폭력의 역사를 환기하고 있다. 화폭 속에 갇힌 마하는 “날마다 테레빈유 마시며 가슴이 먹먹”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녀의 삶은 마치 고통스러운 기억의 루프 안에 갇힌 것처럼 “날마다 1808년 5월 3일, 검은 밤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억압적 상황을 견디고 있을 뿐이다.
이때 고통을 토로하는 그녀의 발화는 단순한 정서적 토로의 층위가 아니다. 마하가 겪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반복이 곧 그림을 그린 고야의 트라우마와 겹쳐지기 때문이다. 1808년 5월 3일은 고야가 스페인 민중봉기와 프랑스 군대의 잔혹한 보복의 자행을 직접 목도한 날이다. 고야는 이 사건을 두 점의 회화에 담아냈는데,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이란 작품이다.
즉 마하가 반복적으로 맞이하는 날짜가 민중봉기와 프랑스 군대의 반혹한 보복의 참상이 발생한 날이다. 이 사건은 고야 혹은 마하 개인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넘어 집단적 학살과 국가 폭력이 각인된 사건으로, 마하는 폭력의 역사를 감내해야 했던 목격자이자 참상을 현재로 호출하는 매개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화폭 속에서 나신으로 고정된 채 관람자의 시선에 노출되는 마하의 처지는, 주권 권력의 폭력을 목도해야 했던 고야의 내적 경험과 섬세하게 겹쳐진다. 고야의 기억 역시 스페인 민중봉기 사건의 잔인한 고통스러운 참상 속에 위치해 있기에, 화폭 속에서 나신으로 관람자의 시선에 포박될 수밖에 없는 마하의 상황 역시 고야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짝패를 이룬다.
“총소리, 총소리, 그리고 높이 팔 벌린 검은 비명소리”는 감각의 차원을 넘어, 고야의 기억 속에 각인된 역사적 트라우마가 현재형으로 되살아나는 방식이다. 여기에 “제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 피 묻은 아가리”라는 신화적 이미지는, 시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결국 자기 파괴적 폭력으로 귀결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환기한다. 시간은 더 이상 치유의 매개가 아니라, 고통을 되풀이하는 “검은 괴물”로 형상화된다.
시에서 마하가 위치한 화폭은 단순한 예술적 공간이 아니라, 폭력의 기억이 응고된 이데올로기적 공간에 가깝다. 마하는 그 안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회화라는 제도적 틀과 응시의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에 포박되어 있다. “날마다” 반복되는 1808년 5월 3일은, 르페브르가 말한 권력의 힘이 관리하는 폭력성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 시는 예술이 어떻게 역사적 폭력의 기억을 저장하고 재현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마하의 탈출 욕망은 곧 고야 자신의 악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내적 투쟁인 바, 그 실패는 국가 권력이 생산한 시간과 공간이 개인의 기억을 어떻게 포획하는지를 증언한다. 「그림에서 빠져나온 마하」는 미적 대상인 마하의 침묵을 해체하고, 주권 권력의 폭력성을 예술 내부에서부터 고발하는 시적 장치로 기능한다.
―『타자와 감각의 변주』전쟁의 폭력성 비판과 침묵의 역동성 -강인한 論 p.103~106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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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나 / 1990년 《문학과비평》 겨울호 시 등단. 시집으로 『푸른 수첩을 찢다』『플롯 속의 그녀들』『립스틱 발달사』『새를 심었습니다』『애월』 평론집으로 『현대시와 속도의 사유』 연구서 『현대시의 상상력과 감각』 편저 『정의홍선집1⸳2』『전숙희 수필 선집』. 대학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