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킹의 「우린 미궁 같은 세계에서 산다」 감상 / 나희덕
우린 미궁 같은 세계에서 산다
킹킹(鯨鯨)
우린 미궁 같은 세계에서 살며, 우린 배운다
에셔의 입체 판화에서 평면 테라스를 찾는 법을
시끌벅적한 거리와 방 사이에서 조용히 함께 지내는 법을
게임과 환각 사이에서, 어른이 되거나 좀체 어른이 되지 않는 법을
(중략)
그러고는 반평생을 잠자는 침대다. 아니면 거룻배
혹은 빨래 건조대, 혹은 지옥의 다리
우리는 지하 정류소에서 걸어 나와 시가지를 지나며
생선과 찬거리를 사서는 생필품이 갖춰진 방공호로 숨어든다
우린 미궁 같은 세계에서 살며, 우린 배운다
내 왼손으로 네 오른손을 그리고, 네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그리는 법을. 그 같은 게임을 되풀이함으로써
환각의 모든 은유를 증명한다, 어른이 되거나 좀체 어른이 되지 않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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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현대시가 한국어로 번역된 선집은 『홍콩 시선 1997~2010』이 유일하다. 시집은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정치 격변기에 시를 써온 세대의 정체성과 역사 인식을 잘 보여준다. 킹킹은 이 시에서 도시국가 홍콩과 중국 대륙, 광둥어와 표준중국어, 식민과 탈식민, 게임과 환각 사이 가로놓인 삶을 “미궁 같은 세계”라 부른다. 에셔의 판화처럼, 그에게 현실은 그로테스크한 공간과 역설로 가득 차 있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가시적으로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환각에서 ‘우리’는 살며 배운다. 출구 없는 순환구조를 지닌 입체 판화에서 평면 테라스를 찾는 법을. 지하 정류소·방공호 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불가능성을 경험한다. “그러고는 침대다”라는 말이 반복되는 것은 그런 무력감의 표현이다. 에셔의 ‘그리는 손’을 연상케 하는 마지막 연에서 “내 왼손으로 네 오른손을 그리고, 네 오른손으로 내 왼손을 그리는” 것은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사라지고 자기지시적 행위가 게임처럼 반복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때 환각은 단순한 허상이 아니다. 미궁 같은 세계 자체가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환각이다. 그 세계 속에서 어른이 될 수도 없고 되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 홍콩만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도 꼭 에셔의 판화 속 미궁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