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과일 사러
김소연
끝물은
반은 버려야 돼.
끝물은 썩었어. 싱싱하지 않아.
우리도 끝물이다.
서로가 서로의 치부를 헛짚고
세계의 성감대를 헛짚은.
내리 빗나가던 선택들. 말하자면
기다림으로 독이 남는 자세.
시효를 넘긴 고독. 일종의 모독.
기다려온 우리는 치사량의 관성이 있을 뿐.
부패 직전의 끝물이다.
제철이 아니야.
하지만 끝물은
아주
달아.
------------------------------------------
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어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
김소연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극에 달하다』『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김소연
끝물은
반은 버려야 돼.
끝물은 썩었어. 싱싱하지 않아.
우리도 끝물이다.
서로가 서로의 치부를 헛짚고
세계의 성감대를 헛짚은.
내리 빗나가던 선택들. 말하자면
기다림으로 독이 남는 자세.
시효를 넘긴 고독. 일종의 모독.
기다려온 우리는 치사량의 관성이 있을 뿐.
부패 직전의 끝물이다.
제철이 아니야.
하지만 끝물은
아주
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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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에 간질간질 꽃이 피었네
오래도록 밟아서 생긴 숲길을
아무 작정 없이 걸어보았네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눈치 채는 이가 없었네
품에 안겼던 사내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되자
심장에 뿌리를 박고
분꽃들이 만개했네
다 알 만한 물방울이
풀 끝에 맺혀 있었네
아득히 들리던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칠 때
땀구멍을 뚫고 채송화가 피었네
멀리 누런 벼들은
논바닥에 발톱 벗어둔 채
누워 있었네
나는 발이 시렸네
발가락 사이로 패랭이가 피었네
허벅지를 타고 나팔꽃이 만개했네
오래도록 밀봉해 둔 과실주를
아무 작정 없이 열어 독배하였네
새들이 울어댈 때 귓속에 길이 열렸네
길을 잃어도 길 속에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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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극에 달하다』『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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