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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뱀 잡는 여자 (외 2편) / 한혜영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08.02.04|조회수298 목록 댓글 0
뱀 잡는 여자 (외 2편)

한혜영




혼자 있는 저녁 무렵 뱀이 들어왔다 베란다에
자살테러범처럼 毒을 품고 잠입한 독사
놀란 새들은
새장을 떠메고 허공 높이 화르르 날아오르고
함께 날아올랐으나 이내 추락했던 나는
엉겁결에 움켜잡은 삽자루를
미친 듯이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한껏
끌어당겼다 놓아버렸던 팽나무 가지처럼
탱탱하게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뱀
그보다 조금 더 높게 솟구쳤던 삽날
섬뜩하게 내리꽂히는 순간 똬리

탁! 풀어지면서 노을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세상에…… 세상에…… 저 진홍빛……

무장해제하고 축 늘어져 있는
녀석을 보고서야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도대체
여자 나이 몇 살이면 뱀을
때려잡을 수가 있단 말인가?

뱀 한 마리
잡는 사이네 나는 부쩍 늙어버린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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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





내가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저기 서성댔을
저 남자를 꼭 빼어 닮은 아저씨를 본 적 있다
바지 구겨질까 전전긍긍
쪼그리는 법도 없이 벌을 서던 그 아저씨
흰 바지에 칼주름 빳빳하게 세워 입고
밤만 되면 은하수처럼 환하게 깨어나서
지루박 장단으로 가뿐하게 산동네를 내려갔던
내려가서는 세월 캄캄해지도록 올라올 줄
몰랐던 그 아저씨 청춘 다 구겨졌어도
바지주름만큼은 시퍼렇게 날 세운 채 돌아와서
서성거리던, 늙고 깡말랐던 전봇대를 본 적이 있다
꼭꼭 닫혀버린 본처 마음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그 아저씨
물음표로 무겁게 떨어졌던 고개 아래
불콰하게 익어가던 염치없음을 본 적 있다
저기
저 남자처럼 비까지 추적추적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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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





휘청휘청 돌아가는 연못
낡은 턴테이블 앞에 쭈그려 앉습니다
예스터데이∼ 흐느끼는 물풀 위로
한 떼의 시간이 꼬리를 끌며 지나갑니다
촌스런 전나무도 이런 팝송 하나쯤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갤 끄덕거리고
오렌지는 아까보다 조금 더 붉어지는데
난데없이 튀어 오르는 판! 금이 간
청춘 위에서 깨어진 노래 알갱이들이
딸꾹 딸꾹 튀다가 구르고 있습니다
속절없이 복제되는 비틀즈
파장과 파장 사이 떠오르는 수천 개
입술이 복화술을 쓰듯 오물거리기 시작합니다
뒤죽박죽 엉키는 세월, 시린 물 속으로
곤두박인 나무그림자에 매달린 여자 하나가
어제의 한 고비를 넘지 못해 마구 휘둘립니다
펄럭이던 지느러미 위험하던 시절의
판… 판을 꺼야하는데……
후미진 구석에 앉아 가슴으로 적갈색
커피를 폭폭 끓여대며 짝사랑했던 더벅머리
그 날의 디제이는 긴 긴 외출 중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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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영 / 1954년 충남 서산 출생. 1989년 《아동문학연구》에 동시조 당선. 1994년 《현대시학》 시 추천.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퓨즈가 나간 숲' 당선. 장편소설 『된장 끓이는 여자』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뱀 잡는 여자』. 시조집 『숲이 되고 강이 되어』. 현재 미국 플로리다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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