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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아아, 훈민정음 / 오세영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2.05.24|조회수506 목록 댓글 0
아아, 훈민정음

   오세영



언어는 원래 신령스러워
언어가 아니고선 신神을 부를 수 없고
언어가 아니고선 영원永遠을 알 수 없고,
언어가 아니고선
생명을 감동시킬 수 없나니
태초에 이 세상은
말씀으로 지으심을 입었다 하나니라.
그러나 이 땅,
그 수많은 종족의 수많은
언어 가운데 과연
그 어떤 것이 신의 부름을 입었을 손가.
마땅히 그는 한국어일지니
동방에서

세상 최초로 뜨는 해와 지는 해의
그 음양陰陽의 도가 한 가지로 어울렸기 때문이니라
아, 한국어,
그대가 하늘을 부르면 하늘이 되고
그대가 땅을 부르면 땅이,
인간을 부르면 인간이 되었도다.
그래서 어여쁜 그 후손들은
하늘과
땅과
인간의 이치를 터득해
’, ‘’, ‘’ 세 글자로 모음 11자를 만들었고
천지조화天地造化오행운수五行運數그 성과 정을 깨우쳐

5종의 자음, 17자를 만들었나니
이 세상 어느 글자가 있어
이처럼 신과 내통內通할 수 있으리.
어질고 밝으신 대왕 세종世宗께서는
당신이 지으신 정음正音 28자로
개 짖는 소리, 천둥소리, 심지어는 귀신이 우는
울음소리까지도
적을 수 있다고 하셨으니
참으로 틀린 말이 아니었구나.
좌우상하左右上下를 마음대로 배열하여
천지간 막힘이 없고
자모子母를 결합시켜 매 음절 하나하나로
우주를 만드는
아아, 우리의 훈민정음.
속인들은 이를
이 세계 어느 글자보다도 더 과학적이라고 하나
어찌 그것이 과학에만 머무를 손가.
그대, 하늘을 부르면 하늘이 되고,
땅을 부르면 땅이,
인간을 부르면 인간이 되는
아아, 신령스러운 우리
한국어,
우리의 훈민정음.




            —시집 『갈필의 서』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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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 1942년 전남 영광 출생. 1968년 박목월 추천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반란하는 빛』 『무명연시無明戀詩』 『황금모피를 찾아서』 『갈필의 서』등 27권. 현재 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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