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자垓字
조은영
현관 앞에는 한 켤레의 슬리퍼가 놓여 있다
눈알이 빠진 모기들이 길을 비켜주지 않아
하얀 발을 내주었다
육인용 식탁이 놓여있는 거실
“여기에 마음을 차릴까”
그는 밑그림을 그리고
음각으로 파낸 다음
잉크를 고르고 있다
“내 식탁은 그냥 식탁이야”
색을 바꿔 여러 번 찍는 다색 판화
식탁 위에 고요한 명징이
한 장씩 차려지고 있다
“우리는 죄가 없어”
먼지 앉은 의자들 사이로
이야기가 흘러내린다
조명등에 모기가 타는 소리
“내게 무심해 줘”
물이 없는 도랑을 판화 칼로 따라가며
벗겨낸 고무를 차곡히 상자에 담고 있다
앉아본 적 없는
육인용 식탁에는
음각 판화가 양각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계간 《딩아돌하》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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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영 / 1984년 성남 출생. 고려대학교 국어교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2020년 《시인수첩》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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