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한 채
김경인
잠이 들면 어디선가 삽 하나가
나를 푹 떠서 데려다 놓는다
가느다란 핏줄을 닮은
서리 낀 유리창 너머
나 어릴 적 엄마아빠가
고장 난 시계 종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거기
나는 지하실보다 어두워져서
어린아이처럼 뛰노는
마당가 햇빛을 끌어당긴다, 그러면 집은
커다란 비닐하우스처럼
무럭무럭 부푼다, 나는 잘 익은
꽈리 빛깔로 열린 단어 몇 개를 따서
바구니에 넣는다, 모르는 척,
떨어져 썩은 엄마아빠도
주워 담는다, 집이 늘어뜨린 어둔 넝쿨에 감겨
내가 구물구물 더 깊은 꿈에 빠지면
누군가 삽으로 나를 깊이 떠서 잠 밖으로 퍼낸다
다시 보니 늙은 오이다 나는
쓸모없는 날들을
으스러지도록 꼭 짠다, 채칼로
그림자도 슥슥 벗긴다
온몸의 물이 다 빠져나가도록
늙은 오이가 운다
얘야, 너무 아프구나
잠이 들면 어디선가 삽 하나가
나를 푹 떠서 데려다 놓는다
나 떠나올 때 꿀떡 삼킨 그것
허물어지고서도 여전히 두근거리는 그것
태어난 적 없어
죽을 수도 없는
집 한 채
—계간 《문학과 의식》 202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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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 1972년 서울 출생.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현재 한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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