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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흙의 시간 속에서 (외 1편)/ 오정국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3.02.08|조회수573 목록 댓글 0

흙의 시간 속에서 (외 1편)

 

   오정국

 

 

나는 이 풍경 속에서 일치감치 재를 꺼내온 것이라

꽃의 시간,

나무의 시간,

흙의 시간을 뒤적거렸지

숨이 차오르도록 헐과 할을 반복하면서

 

새벽녘에 잠을 깨면

벽시계를 보지 않았어

냉장고 불빛에 얼굴을 펼쳐놓고

쩌억쩌억 금이 가길 기다렸지

얼음덩어리의 푸르스름한 숨결을 따라

내 핏줄 굽이치던 노래가 있었다고 믿었던 거라

 

현관문이 열리면

도어락 저편으로 사라지는 4608#처럼

액정화면의 타임캡슐에 봉인되긴 싫었어라

 

나는 이 풍경 속에서

진흙 바닥을 뒹굴고 춤추고 노래했지

 

나의 기억은

폐지와 의류, 쇠붙이로 분류되고

유리병과 플라스틱으로 재활용되는데

분리수거는 일주일에 한번

토요일, 토요일을 끝없이 중얼댔어

 

나는 이 풍경에 휘감기고 뒤섞이고 흩날렸지

비바람에 흩어지고

폭설에 휩쓸리며

악천후의 후일담으로 남겨진 것이라

 

컨테이너에 말라붙은 칡덩굴처럼

전봇대 귀퉁이의 입간판처럼

 

 

 

밤의 해변은 끝없이

 

 

 

멀어지면서 저무는 뒷모습

밤의 해변은

멀거나 가깝고

 

수평선에 넋을 놓다가 파도 한 줌

노을빛으로 울먹이다가 파도 한 움큼

새벽바다 어선의 불빛에게도 파도 한 자락

 

밀려오고 쓸려가는 무한반복의 물굽이가

무너지고 멈춰 설 때

비로소 홀로임을 깨닫는 모래알들

 

제본되지 않는 모래의 책이 사방에 널려 있다

닭 뼈다귀 개뼈다귀 사람 뼈다귀가 굴러다닌다

텅 빈 모래밭에서

희고 검은 돌멩이의 시계판 위에서

발끝에서 물밑에서

 

물결은 겹쳐져서 출렁이지만

제각각의 찰라 속으로 사라진다

 

폭죽이 솟는다 허공에서 꽃피는 불꽃의 아우성

캄캄하게 메아리치는 겹겹의 구멍들

저 상처를 어찌하랴 싶지만

밤의 해변은

끝없이

 

널빤지와 신발짝과 폐타이어와 함께

헛딛지 않고선 돌이킬 수 없는 발자국과 함께

 

 

               ―계간 《사이펀》 2022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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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국 / 1956년 경북 영양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8년 《현대문학》 등단.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내가 밀어낸 물결』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시론집 『현대시 창작시론: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야생의 시학』 등. 문화일보 문화부장,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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