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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손 있는 날 / 김은상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3.08.04|조회수422 목록 댓글 0

 

손 있는 날

   김은상




밤의 관자놀이에서 타액이 흘러내립니다.

신혼부부가 이사를 간 텅 빈 방,
시냇물 소리 흘러오는 개울입니다.

떠나지 못한 이웃의 체취 한밤의
유령선으로 표류하는 중입니다.

입을 막은 손가락들 사이에서 꿈틀대던
살결들이 들려옵니다. 봄날

활짝 피어오르는 숲속 같습니다.

벽이 간직한 비파를 더듬거립니다.

얼굴이 제멋대로 찡그려질 때까지
화들짝 그 꽃들 다 질 때까지

구석의 이명으로 구겨집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오해이므로,

꽃잎을 덮고 잠들었던
송장메뚜기가 날아갑니다.

이불 속에서 소년의 발목을 잡아당기며

한 여자의 몸을 속삭였던
한 남자의 새벽처럼,

나의 출생은 사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이 그립고 또 두려워지는 아침이 오기 전에
소년을 살해해야 합니다. 아직

남아 있는 봄꽃들 다 꺼지기 전에.

나는 손 있는 날 태어났습니다.



              ―계간 《백조》 2023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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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상 / 2000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유다복음』. 소설 『빨강 모자를 쓴 아이들』 『나의 아름다운 고양이 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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