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웃
남진우
땅을 파니
쓰레기가 나왔다
땅을 파니
부서진 가구와 연탄재 삭은 책더미와 깨진 그릇들이 나왔다
온갖 고물과 입다 버린 옷가지들을 헤치고 땅을 파헤치니
시체가 나왔다
한 구 두 구 세 구 시체를 파내며 땅을 파니
아주 오래전 조상들이 쓰던 유물들이 나왔다
폐사지와 왕궁터가 나왔다
다시 땅을 파니
누군가 묻어둔 금괴가 나왔다
그리고 다시 땅을 파니
자갈과 죽은 나무뿌리 뒤얽힌 어두운 지층을 파 내려가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검은 진흙만 꾸역꾸역 쏟아졌다
땅을 파니
포클레인도 철수한 깊은 땅속을 파고 또 파들어가니
삽이 휘어지고 곡괭이가 부러지고
문드러진 손톱으로 미친 듯이 땅을 긁어내리니
컴컴한 지하동굴 저 아래에서
거대하게 뚫린 구멍이 나왔다
땅을 파니
밑도 끝도 없이 땅을 파니
구멍이 나와 더 큰 구멍으로 이어졌다
구멍 속에서
흙을 퍼내고 흙을 뒤집어쓰며 땅을 파니
점점 커져가는 구멍 속에서 땅이 솟아올라
삽질하는 나를 삼켜버렸다
―계간 《詩로여는세상》 202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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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죽은자를 위한 기도』『타오르는 책』『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사랑의 어두운 저편』『나는 어둡고 적막한 집에 홀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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