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 시 읽기

[시]검은 사슴 / 채호기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4.07.29|조회수507 목록 댓글 0

검은 사슴

 

   채호기

 

 

 

새벽 숲에서 검은 사슴과 마주쳤을 때

검은 사슴은 몸을 정면으로 돌려

몇 그루 나무의 검은 수피를 지나,

떨리는 가지와 잎을 지나,

똑바로 인간의 눈을 응시했다.

 

그 짧은 시간

꾹 다문 입 위 촉촉한 검은 코와 콧김.

유선형의 얼굴 양쪽에 큰 나뭇잎처럼 펼쳐져

잎맥이 도드라진 실핏줄 선명한 두 귀이마 위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세를 꺾어다 붙인 빛나는 두 뿔.

무엇보다 바닥 모를 깊은 수심의 검은 눈동자가

 

인간의 두 발을 꼼짝 못하게 멈춤 속에 붙잡아 두었다.

주위의 모든 나무들이 그를 옹립하며 수직으로 서 있었다.

검거나 회색인 나무줄기에 번져가는 녹색 잎들의 부드러움이

그의 마음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렌즈가 나뭇가지들을 헤집을 때

쓰러져 있던 한 나무가 일어서듯

갑자기 또 다른 사슴이 일어섰고

둘은 화들짝 산 아래로 사라졌다.

(해칠까 무서워 도망간 거라고?

그건 인간의 터무니없는 상상)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새벽의 영역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겠다.

저녁에 다시 인간의 영역으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겠다.

 

 

            ―계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24년 봄호

-----------------------

채호기 / 1957년 대구 출생. 1988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시집 지독한 사랑』 『슬픈 게이』 『밤의 공중전화』 『수련』 『손가락이 뜨겁다』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 거다』 『줄무늬 비닐커튼산문 주고받다(공저)가 있다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