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지에서
함기석
빛이 꼬물꼬물하다
털이 샛노란 수백 마리 송충이 유충처럼
무릎 연골 다 닳은 박달나무랑 이끼 마른 돌탑을 돌아
먼 옛날 언덕에 서서 먼 훗날을 바라보는
백일홍 어린 눈망울
반짝 빛날 때, 나는 아주 잠시 사람일 사람
이마로 햇빛 받으며
쪼개진 등으로 억년 하늘을 업어 자장자장 잠재우는
저 벙어리 부도들은
내 울음의 어마마마고 그녀들 웃는 턱수염이다
폐사지 사방이 화엄 자궁이고 우주다
빛이 팔랑팔랑하다
날개 샛노란 수백 마리 아기나비처럼
예쁜 건 철없는 산새랑 속을 다 들어 낸 연못 하나
―계간 《시와 세계》 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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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 『국어 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 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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