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 혼방 (외 2편)
이서화
참다랑어를 가르면
언뜻 먼바다의 찬 물살에 못 이겨
겹겹이 껴입은 흰 지방질, 마치
폴리 혼방 내의 같다
겹겹의 보온성 물과 물 사이의
덧문 같은 지방질을 껴입고 참다랑어는
물살보다 빠른 물고기가 되었다
차디찬 찬물을 견디려면
이 정도는 껴입어야만 한다는 듯
몇 벌 보온성 자구책이지만
그 사이사이들이란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한겨울 쌀쌀한 입맛들 녹이는
참치집에서도 비싼 부위다
옷을 입지 않고 견뎌 온
인간의 역사엔
따뜻함에 앞서 무감각이란 의복이 절실했듯
깊은 감각은 안쪽에
지금도 몇 겹으로 두고 있다
물컹 씹히는 무감각의 맛
몇 점 오호츠크 해역의 겨울을 맛본다
그것은 겹겹의 파도 맛이고
항진하는 물속의 맛이다
예상했던 일
다 자란 무는
슬쩍 잡아당기면 쑥 빠진다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모처럼의 파란 하늘이 묻었다는 듯
무의 아래쪽은 달밤인 듯 희다
누가 시켜서 피는 꽃은 없지만
늦가을 비나 비행을 준비하는 홀씨들은
다 예상하는 일들이다
우리는 그 예상을 시간으로 쓰고
좋았거나 쓰라렸던 시절을 돌아본다
후회를 덜어 내고 회상을 소비한다
알 수 없는 앞날을 살아간다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그 일을 향해
저마다의 예상까지 살아가는 일이다
본래 있었던 것들과
큰 풍파도 없이 곱게 늙은 사람일지라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꽃 피고 홀씨를 날리는 일을 따라
한해살이들을 보며 위안받는 일
어떤 예상 앞에서도 차분한
노인의 등에 업힌 손주는 아직 겪은 일이 없어
예상하는 일도 없다
분간도 모르는 한때가
자장가 속에서 서성인다
달의 시간
해남 송지면 대죽리에는
매일 한 시간씩 느려지는 달이 있다
달은 밤의 섬
한낮의 달은 어디엔가 숨어 있어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열렸다 닫히기도 한다
등 굽은 할머니가
낡은 양동이를 들고 바지락을 캐러 나온다
할머니에게 물 들어오는 시간을 물으면
아직 달은 먼 곳에 있다고 한다
반으로 갈라지는 바닷길
바지락도 하루에 두 번 갈라지고
검은 달이 완두콩 갈라지듯
반으로 갈라질 때가 있고
환한 쪽은 이곳의 밤
하늘에 떠 있고 검은 쪽 달은
어느 낮의 지명에 꼭꼭 숨어서
애꿎은 물이나 갈라놓고 있을까
곧게 길이 난 바다의 등과 달리
바지락 등을 닮아 굽어 있는 할머니
하루에 두 번 갈라진다는 것을 배운
등이 굽어지는 시간이다
아직도 썰물과 밀물을 앓고 있는 여자와
더 이상 썰물을 앓지 않는 여자가
바다를 본다
―시집 『누가 시켜서 피는 꽃』 20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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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화 / 강원 영월 출생. 2008년《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 『굴절을 읽다』 『낮달이 허락도 없이』 『날씨 하나를 샀다』 『누가 시켜서 피는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