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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폴리 혼방 (외 2편) / 이서화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4.11.02|조회수605 목록 댓글 0

폴리 혼방 (외 2편)

 

  이서화 

 

 

참다랑어를 가르면

언뜻 먼바다의 찬 물살에 못 이겨

겹겹이 껴입은 흰 지방질, 마치

폴리 혼방 내의 같다

 

겹겹의 보온성 물과 물 사이의

덧문 같은 지방질을 껴입고 참다랑어는

물살보다 빠른 물고기가 되었다

 

차디찬 찬물을 견디려면

이 정도는 껴입어야만 한다는 듯

몇 벌 보온성 자구책이지만

그 사이사이들이란 또 얼마나 부드러운지

한겨울 쌀쌀한 입맛들 녹이는

참치집에서도 비싼 부위다

 

옷을 입지 않고 견뎌 온

인간의 역사엔

따뜻함에 앞서 무감각이란 의복이 절실했듯

깊은 감각은 안쪽에

지금도 몇 겹으로 두고 있다

 

물컹 씹히는 무감각의 맛

몇 점 오호츠크 해역의 겨울을 맛본다

그것은 겹겹의 파도 맛이고

항진하는 물속의 맛이다 

 

 

예상했던 일

 

  

다 자란 무는

슬쩍 잡아당기면 쑥 빠진다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모처럼의 파란 하늘이 묻었다는 듯

무의 아래쪽은 달밤인 듯 희다

 

누가 시켜서 피는 꽃은 없지만

늦가을 비나 비행을 준비하는 홀씨들은

다 예상하는 일들이다

우리는 그 예상을 시간으로 쓰고

좋았거나 쓰라렸던 시절을 돌아본다

후회를 덜어 내고 회상을 소비한다

 

알 수 없는 앞날을 살아간다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그 일을 향해

저마다의 예상까지 살아가는 일이다

본래 있었던 것들과

큰 풍파도 없이 곱게 늙은 사람일지라도

이미 다 알고 있어 꽃 피고 홀씨를 날리는 일을 따라

한해살이들을 보며 위안받는 일

 

어떤 예상 앞에서도 차분한

노인의 등에 업힌 손주는 아직 겪은 일이 없어

예상하는 일도 없다

 

분간도 모르는 한때가

자장가 속에서 서성인다 

 

 

달의 시간

 

 

 해남 송지면 대죽리에는

매일 한 시간씩 느려지는 달이 있다

달은 밤의 섬

한낮의 달은 어디엔가 숨어 있어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열렸다 닫히기도 한다

 

등 굽은 할머니가

낡은 양동이를 들고 바지락을 캐러 나온다

할머니에게 물 들어오는 시간을 물으면

아직 달은 먼 곳에 있다고 한다

 

반으로 갈라지는 바닷길

바지락도 하루에 두 번 갈라지고

검은 달이 완두콩 갈라지듯

반으로 갈라질 때가 있고

환한 쪽은 이곳의 밤

하늘에 떠 있고 검은 쪽 달은

어느 낮의 지명에 꼭꼭 숨어서

애꿎은 물이나 갈라놓고 있을까

 

곧게 길이 난 바다의 등과 달리

바지락 등을 닮아 굽어 있는 할머니

하루에 두 번 갈라진다는 것을 배운

등이 굽어지는 시간이다

 

아직도 썰물과 밀물을 앓고 있는 여자와

더 이상 썰물을 앓지 않는 여자가

바다를 본다

 

 

 

            ―시집 누가 시켜서 피는 꽃20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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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화 / 강원 영월 출생. 2008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 굴절을 읽다』 『낮달이 허락도 없이』 『날씨 하나를 샀다』 『누가 시켜서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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