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값 (외 2편) 임지은 다들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거야? 이 년 만에 새로 나온 작가의 책을 주문하며 밥 먹고 글만 쓰나 봐, 생각했다 친구가 말했다, 너도 밥 먹고 시만 쓰잖아 그건 내가 아파서, 시에 정신을 팔고 있지 않으면 아픈 것들이 너무 또렷하게 느껴져서 그럼 시인들은 모두 아픈 존재들인 걸까? 친구는 답해줄 수 없고 나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n 개의 삶을 사는 강혜빈 시인*을 만났다 대학원 수업이 끝난 후 짬을 내 카페에서 시를 쓰고 포토샵 작업까지 마친 그녀는 네 번째 자아로 앉아 있었다 저도 가끔은 아프기 위해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보통이 보통을 넘어서고 있는 시대에는 열심이 기본값이 된다 그렇게 보통이 새롭게 정의되고 있는 사이 우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을 한 개로 줄이기 위해 ······밥을 차처럼 후루룩 마셨다 밥알이 최선을 다해 목 뒤로 넘어가고 있다 밥알이 뭐라고 밥알까지도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걸까 몇 개의 학교와 몇 개의 직장과 몇 개의 자격증이 몇 개의 언어와 몇 개의 점수가 몇 개의 웃음으로 피어나기 위해 시인들도 시를 쓴다고 쏟아지는 시를 비처럼 맞으며 밤새 쓴 시를 소리 내 읽어본다고 그것도 여러 번, 그것도 매일 밤 괜찮지 말아요 뭐든 사랑해 버려요 양손잡이가 된 세상에선 두 손이 아니라 아무 손이나 써도 괜찮을 거라고 오른손잡이인 그녀가 시를 꾹꾹 눌러 쓰는 동안 나는 기도했다 열심이 대충의 외피를 입기를, 3월이 아프지 않고 4월이 되기를, 보통이 보통에서 멈추기를 * 그는 시인, 사진가, 대학원생, 학원 강사 외에도 펭귄, 무지개, 유리의 역할을 맡고 있다. 꿈속에서도 시인입니다만 2 당신은 꿈속에서도 시인이지만 언제나 시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쓰지 않는 날이 많고 아주 가끔 시가 당신을 씁니다 무의미한 책상 앞의 나날들 책상에 엎드려 꿈꾸는 것이 더 시적인 사건 시인이 됐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말이죠) 행복은 복합터미널 같아서 부산행 버스처럼 직접 찾아서 느껴야 합니다 간혹 부산행 버스가 당신 앞에 와서 서는 일도 그런 일은 드물고 출발 시간이 코앞인데 비어 있는 발매기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1번 플랫폼 옆이 2번이 아니라 왜 13번인지 당신이 알았던 것들이 소용없어지고 당신이 탄 버스가 부산행이라는 믿음만이 당신을 부산으로 데려다줍니다 행복엔 잘잘못이 없고 계속하면 됩니다 세 번의 좌절보다 한 번의 도약에 기뻐하며 무뎌지는 감각을 거스러미처럼 뜯어내며 하지만 밤새워 킥킥거리던 일이 더는 흥미롭지 않다면 최초의 호기심마저 날아가 버린 궁금증처럼 킁킁거려도 맡아지는 게 없다면 언제까지 꿈만 꿀 수 없는 노릇이고 당신은 꿈속에서 시인이었던 당신을 따라 하기로 합니다 Alt 작은 것을 더 작게 말하기 Shift 본 것을 보지 않고 그리기 Ctrl 속눈썹의 무게만큼 힘주기 당신은 이제 꿈속에선 시를 모르고 꿈 밖에서 시를 만지고 자르고 꿰맵니다 사물들 리본과 화분이 약속한다 간이 의자와 테이블이 포옹한다 단골손님과 주인으로 만나 혼인 신고를 마친 보르헤스 전집과 3단 책장 새로 산 우산이 겨울비를 맞는다 계단이 물 자국을 빨아들인다 투명한 창문에 입김을 불어 글씨를 쓴다 오래오래 잘 사세요 부러진 밥상과 스프링이 빠진 볼펜 사람은 고쳐 쓰지 말랬지만 사물은 몇 번이나 고쳐 쓸 수 있고 머리부터 집어넣는 티셔츠의 세계 몸통이 구멍인 빨대의 세계 뜨거워져야 움직이는 엔진의 세계 달력이 1월을 사랑해서 새해가 온다 바퀴가 동그라미를 따라 해서 자전거가 움직인다 컵과 얼음이 만나서 완성되는 여름 구멍 난 장갑이 눈사람의 차지가 되는 겨울 창문에 쓴 글자가 남아 있다 오래오래 —시집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2024.6 -------------------------------- 임지은 / 1980년 대전에서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 『때때로 캥거루』 『이 시는 누워 있고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