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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슬픔의 최종본 (외 2편) / 김다연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5.04.10|조회수438 목록 댓글 0

슬픔의 최종본(외 2편)

 

   김다연

 

 

나는 무뎌지고 무뎌진 슬픔의 수정본으로 어떤 이미지도 어떤 이야기도 없는 눈물을 지닌다 모든 빛들이 나를 통과한 뒤에도 달라지지 않은 낯빛을 받아들인다 어딘가에 나와 언젠가의 나는 관계가 없다 연속되지 않은 요소로 드문드문 드리워지는 그림자와 같이 내가 아닌 어떤 것을 지칭하는 나는 눈을 감고 있는 어둠의 지향으로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경우의 수로 불려도 꽃이 되지 않는 어떤 이름을 지닌다

 

내가 떠난다면 나는 남을 것이다 내가 남는다면 나는 떠날 것이다 나다움이 없는 완전한 외부로 향한다 이젠 아무렇지 않은 일이다 거기서 거기인 상태를 거듭하는 슬픔은 이건 슬픔이 아니라고 말한다 더 이상 시간에 속하지 않는 과거와 미래를 지금으로 덮어쓴다 자정이거나 정오였을 풍경은 구성되지 않는다

 

저 끝까지 가도 거기가 끝은 아닐 텐데 더는 갈 곳이 없어 저 끝에서 끝나게 될 나의 최종은 수정하다 날아간 슬픔으로 저장된다 모호하고무모하며덧없는 한낮의 형상으로파일명만 바뀐 최최종의 밤으로

 

 

 

너는 너의 밤을 중얼거리고

나는 나의 꿈을 웅얼거리고

 

 

 

무언가 쓰고 싶었는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는 밤일 뿐인데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인데

몸에서 새가 울고 강이 흐른다

 

나는 조금 더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아

나무 곁으로 옮겨 가야 할 것 같아

 

어제 보이던 것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데

 

너는 너의 밤을 중얼거리며

나는 나의 밤을 중얼거리며

손을 잡았을 뿐인데

 

우리는 우리처럼 보였지

 

너는 거의 나무에 닿은 거 같아

곧 잎이 피어 오를 거 같아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아직도 시를 쓰니?

 

나는 여기에 홀로 남아 여기의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어

 

무언가를 쓰고 싶었는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텃밭을 가꾸고 방울토마토를 기다리면서

 

 

 

몇 방울의 물로 너의 강에 닿을

 

 

있다 그냥 있다 얼어붙은 말의 조각들이 입김만 내뿜는 추위 속에 있다가 간격이 벌어지는 더위 속에 있다

 

가질 필요 없는 것을 가지느라 하루 한 칸씩 좁아지는 방에 누워 어디로든 갈 수 있었는데 어디로도 가지 못했지 무엇이든 될 수 있었는데 무엇도 되지 못했지

 

구름이 앉아 있는 지붕을 본다 둔치에서 둔치를 오가는 상상에서 구름이 떠난다 입에서 말이 떠난다 두꺼비 집을 짓다 두꺼비 집과 허물어진 이 여름이 끝말잇기로 이어 가던 단어와 멈춘다

 

​ 살아 있는 게 슬픔인 줄 모르고 죽음을 슬퍼하다 울다 그친다 가로등 깜박이는 풀밭에 앉아 깜박거린다 기차가 지나가는 동안 나는 있다가 없다 없다가 있다

 

언제나 비는 내린다 어떤 부딪힘도 없이 한 줄기 한 줄기 멈추지 않고 비에 도달한 비는 언제나 비다

 

​ 읽고 또 읽은 비를 지나왔을 뿐인데 어느덧 가늘어지는 빗방울과 함께 빗속으로 들어간다

 

한 때 강이었던 너의 강에 몇 방울의 물로 겨우 닿을 듯해서

 

 

              ―시집 나의 숲은 계속된다』 2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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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연 / 2017년 문학3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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