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다가 새는 (외 2편)
김사이
땅거미 가만가만 내려앉는
구종점 네거리 언덕배기 인력사무소 앞에
야전가방 하나씩 둘러멘 사람들
오야지를 에워싸고
내밀어진 손들에 하루치 몸값이 착착,
20년 날일 쫑내고 낙향한
노총각 조씨가 툴툴거리며 그랬던 것처럼
센다 천 원짜리 닳고 닳도록 세고 또 세 본다
아무리 세어도 한 장이 두 장, 열 장이 되지는 않고
하루를 세고 열흘을 세고 일 년을 세며
생을 셈해 보며 탁 풀리는
손 안에 움켜쥔 서푼짜리 삶이 샌다
노가다판에도 초록은 우우 우거져 여름은 깊어가고
-------------------------------------------------------------
물오른 길
한가위 달빛이 무색하게 들썩이며 번쩍거리는 목포를 돌아 고향으로 가는 길 물오른 처녀 방뎅이처럼 탱탱한 둥근 달, 몸뚱이가 환장한다
쫄망쫄망한 아이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것처럼 빙 둘러 티 하나 없이 까만 산봉우리들 경계 위로 보름달은 더욱 빛을 발하고 덩달아 내 몸 色色이 투명해진다 들뜬 택시기사 얼굴을 어루만지는 터질 것 같은 저 달, 아, 무섭도록 사랑의 기운이 충만해지며 숨소리마저 잦아들고, 토란잎 위에 또로록 굴러다니는 작은 물방울들처럼 총총한 별들은 내리쏟아지며 은빛 꿈을 잉태시키는데 저 까만 산그림자 아래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풍성한 달빛 온몸으로 받아 그 빛으로 사랑을 나누어보았으면, 흔적도 없이 달의 정령이 되었으면…….
------------------------------------------------------------------
어느 늦은 밤
지하철을 타려고 섰다
바닥에 그어 놓은, 넘지 말아야 할 선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사람들
제 밥그릇만한 고단함이 얹혀져
늘어뜨린 어깨 사이로 닮았다
평일 늦은 시간 종로3가역
소리마저 가라앉은 채
고요하다
저 깊은 속 내장까지 흔들어대며 달려오는 지하철
문이 열리자 비릿한 냉기가 끼친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치고
안경 쓴 여자 한 명
선을 비켜나 장승처럼 서 있다
무리들 속에서 울려나온
'어! 저 여자 맹인이네, 이거 막찬데...'
말이 지하철 안에서 맴돌고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어둠 속으로 타들어간다
글쎄, 길은 아직 멀었나 보다
------------------
김사이 / 1971년 전남 해남 출생. 호남대 국문과 졸업.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공부. 2002년 《시평》을 통해 등단.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
김사이
땅거미 가만가만 내려앉는
구종점 네거리 언덕배기 인력사무소 앞에
야전가방 하나씩 둘러멘 사람들
오야지를 에워싸고
내밀어진 손들에 하루치 몸값이 착착,
20년 날일 쫑내고 낙향한
노총각 조씨가 툴툴거리며 그랬던 것처럼
센다 천 원짜리 닳고 닳도록 세고 또 세 본다
아무리 세어도 한 장이 두 장, 열 장이 되지는 않고
하루를 세고 열흘을 세고 일 년을 세며
생을 셈해 보며 탁 풀리는
손 안에 움켜쥔 서푼짜리 삶이 샌다
노가다판에도 초록은 우우 우거져 여름은 깊어가고
-------------------------------------------------------------
물오른 길
한가위 달빛이 무색하게 들썩이며 번쩍거리는 목포를 돌아 고향으로 가는 길 물오른 처녀 방뎅이처럼 탱탱한 둥근 달, 몸뚱이가 환장한다
쫄망쫄망한 아이들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것처럼 빙 둘러 티 하나 없이 까만 산봉우리들 경계 위로 보름달은 더욱 빛을 발하고 덩달아 내 몸 色色이 투명해진다 들뜬 택시기사 얼굴을 어루만지는 터질 것 같은 저 달, 아, 무섭도록 사랑의 기운이 충만해지며 숨소리마저 잦아들고, 토란잎 위에 또로록 굴러다니는 작은 물방울들처럼 총총한 별들은 내리쏟아지며 은빛 꿈을 잉태시키는데 저 까만 산그림자 아래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풍성한 달빛 온몸으로 받아 그 빛으로 사랑을 나누어보았으면, 흔적도 없이 달의 정령이 되었으면…….
------------------------------------------------------------------
어느 늦은 밤
지하철을 타려고 섰다
바닥에 그어 놓은, 넘지 말아야 할 선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사람들
제 밥그릇만한 고단함이 얹혀져
늘어뜨린 어깨 사이로 닮았다
평일 늦은 시간 종로3가역
소리마저 가라앉은 채
고요하다
저 깊은 속 내장까지 흔들어대며 달려오는 지하철
문이 열리자 비릿한 냉기가 끼친다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치고
안경 쓴 여자 한 명
선을 비켜나 장승처럼 서 있다
무리들 속에서 울려나온
'어! 저 여자 맹인이네, 이거 막찬데...'
말이 지하철 안에서 맴돌고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어둠 속으로 타들어간다
글쎄, 길은 아직 멀었나 보다
------------------
김사이 / 1971년 전남 해남 출생. 호남대 국문과 졸업.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공부. 2002년 《시평》을 통해 등단. 시집 『반성하다 그만둔 날』.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