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탄(木炭) 외 2편
박열아 (朴烈我)
나의 안에서, 그리고 당신의 살 속에서 목탄은 빛난다
하루의 출정에서 돌아오는 저 무모한 사내들의
끈적거리는 입술에 목탄이 묻어 있다
누우런 소멸(消滅)이 깔리는 문밖,
한 끼의 양식과
어둠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무거운 눈꺼풀 밑에도 목탄이 묻어 있다
무너질 듯 자리에 누우면
눅눅한 살 밑으로 내리는 목탄의 안개
잠 속에서도, 죽은 시간 속에서도 더욱 목탄은 빛난다
스물아홉 해의 여름을 난파한
여자의 죽음 속에 끼어 빛나는 목탄
영원과 지하주점의 어두운 돌층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우울한 손톱은 목탄이다
오늘도 푸성귀와 노동을 열심히 씹고 있는
야만의 이빨들
도도한 불평으로 굳어 버린 시민들의
뜨거운 내장 속에 도사린 혁명은 목탄이다
음험한 짐승처럼 헐떡이는 굴뚝 밑
오르내리는 승강기 안에서 이유 없이 시들어 가는
희고 어두운 얼굴들은 목탄이다
흑인의 등살처럼 번뜩이는 여름 바다와
흰 소금이 서걱거리는 하늘
나도 목탄이고
지금 당신도 목탄이다
원목(原木)을 도살하는 잔인한 톱날 곁에
잘려진 시대 죽어 있는 역사(歷史)를
여자와 아침 식사와
오만한 제왕(帝王)의 반생을 이야기하면
이윽고, 나와 당신의 뇌수에서 조금씩 묻어나는 목탄
보라. 사나운 바람을 거느리고
마침내 한 사람의 광부는 온다
우리들 살의 바다에 불을 지르는 하느님의 흰 손,
그 위대한 폭력의 흰 손을 외면한 채
그러나 야망의 어두운 목탄은 빛난다
나의 안에서, 그리고 당신의 살 속에서
패주(敗走)한 젊은이들의 저 우울한 어금니 사이에서.
《월간문학》 1969년 12월호에 발표
젊은 수부(水夫)의 편지
아침마다
우리는 죽어서 돌아온다
밤새워 그물을 짜던
우리들 괴로운 영혼은
마침내 한 겹의 흰 허물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들의 목숨은 언제나 비어 있고
저승까지 들리는
허무의 물결 소리만 하늘에 차는데
닿을 길 없는 저 비원의 바다에
우리들의 부질없는 젊음은 버려진다
불 꺼진 폐선의 밑바닥에서
꿈도 없는 반생을 죽어서 살아온
어둠보다 막막하고 무력한 친구여
나가 보아도, 나가 보아도 떠나갈 바다는 없고
물결에 부서지는 물결 소리뿐
우리들 수장(水葬)된 젊음은 다시 눈뜨지 않는다
오늘도 어두운 갯벌에 쓰러져 누운
우리들의 황폐한 몸
황폐한 굶주림 속으로
헐벗은 저 바다는 사라져 간다.
1971. 3. 31
전표지역戰標地域
오랜 수난의 일정을 거두어 돌아간 피곤한 손들이 먼 지평에 하얀 전표戰標로 서면
이름 없이 죽어간 어느 병사의 무덤 앞에
하얗게 분장한 묘비墓碑는
이슬져 승화昇華한 가슴을 마주하여 먼 날의 눈을 들고,
상처 난 수목樹木의 등허리엔 적요寂寥한 비가 내리고 있다.
충충한 숲을 돌아가던 가슴의 긴 포복匍匐이 끝나는 곳에
파문 져 오는 바람의 여운……
잔광殘光에 씻기운 하얀 촉루 위에 어둠은 내리고
아물어 가는 우리들 손의 상흔傷痕 언저리에 잠들어 있는 전쟁.
어두운 폐원發園의 뒤안길에서
목 짤린 해바라기는 기아飢餓의 골짜기로 줄지어 밀리고
끊어진 다리 아래 아직도 목쉰 노랫소리는 남아
저리도 긴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다.
마지막 계단을 향하여 숨 죽여 오르던 의지의 절정絶頂에서
가슴을 앓는 비둘기.
갈가리 찢긴 기폭旗幅에 바랜 얼굴을 비비며 사탑斜塔의 그늘 밑으로 떨어져 가면
목숨의 밑바닥으로만 흘러가는 강기슭에도 이름 없는 묘비는 서고
무덤으로 가는 커다란 군화 발자국마다
슬프게 싱싱한 가슴들이 잠들어 있다.
지금
창窓을 등지고 돌아앉은 무덤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어린 병사의 푸르고 순수한 눈에
적요한 비는 내리고.
분산된 사상思想의 내부에서
가슴을 상한 전쟁은 마지막 방위方位의 선을 긋고 있다.
냉각된 기류 속을 오가는 싸늘한 시선들-.
마지막 얽히는 시선의 매듭에서 스스로의 자세를 가누는 오늘.
한 색으로 물들어 가는 우리들 손의 상흔傷痕에
음 칠월의 싱그러운 포도는 익어가지만
깨어진 형상形象을 흔들며 울려오는 종소리. 종소리……
도색塗色된 분신을 떨어뜨리며 돌아간 시간의 어깨 너머
태양은
무너진 성벽 밑으로 하강하고.
밀려간 폐상廢象의 긴 대열 끝에
뒤척이는 묘지.
낯설은 철조망 가에
죽어간 젊은 혼魂들의 마지막 음성에 젖어
다시 나뭇잎은 피어도
낭자한 파편의 무덤가에서
지금도 우리는
수피樹皮의 상흔 하나 무심히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초연硝煙에 그을린 악보에 상채기진 얼굴을 묻고
이름 없는 묘비에 등을 기대면
가슴은 빛나 병들지 않았으나 성낸 포복은 끝날 줄을 모른다.
기도祈禱와 같이
가느란 목을 빼어 늘이어 비정한 음악을 흔들자.
응혈凝血진 눈을 닦으면
녹슬은 탄피에 묻혀간 어린 날의 기억 위에도
적요한 비는 내리고.
우후의 죽순처럼 무구無垢하게 돋아난 묘비 위에 비는 내리고.
깨어진 도시의 창에도, 지붕 위에도, 우리들 모두의 가슴 위에도
적요한 비는 내리고……. (1959.10)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심사평: 조지훈)
가작 '나팔 서정抒情' (정진규), 가작 '가을의 詩' (박진환)
—박열아 시집 『사막의 배』 2026.5 청색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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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아 / 1938년 순창 출생. 순창농림고,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 본명 영렬(榮烈).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전표지역(戰標地域)」이 당선되어 등단. 1962년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신춘시新春詩’ 동인. 귀향 후 2025년 작고. 첫 시집 『사막의 배』는 2026년 5월 청색종이에서, 유고 시집 『구름 위의 여자』는 2026. 6월에 황금알 출판사에서 출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