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아니다 (외 1편)
신덕룡
밖이 수상하다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뒤쪽에
고춧대들이 줄지어 섰다. 땅바닥에 붙어 말라 가던 호박과 방울토마토 금송화 노란 꽃들 모두 잠잠하다 가지 끝에 달려 있는 고춧잎들만 풀이 죽었다 느닷없는 된서리에 새까맣게 변했다 밤새 추위에 떨다가 깊은 잠에 빠진 채 죽음을 맞았다 후일담은 없겠다 삶과 죽음이 빈틈없이 맞물렸으니 어제가 꿈이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이르다 지금도 꿈속 아니겠냐고, 흰소리할 뻔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야간 산책
밤공기를 콧등으로 쐬고 와야 하루가 정리되는 느낌이다 천천히 걸으며 듣고 맡는 풀벌레 소리와 들꽃 향기로 속이 환해진다 운이 좋아 별빛에 샤워라도 하는 날이면 온몸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과거가 말끔하게 씻긴 느낌이다 어떤 과거는 참으로 끈덕지다 기억의 주름들 사이사이에 끼어 있다가 틈만 나면 비집고 나와 냄새를 피워 댄다 달갑잖은 불청객처럼 불쑥 찾아와 얼굴을 붉히게도 하고 괜스레 치미는 울화에 몸을 떨게도 한다 좀처럼 갚기 힘든 빚이다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휙, 날아가는 새처럼 도망치는 게 상책이지만 오늘 밤
별빛 쏟아진다
밖에 나가 샤워를 할 시간이다
—시집 『속이 뻔한 울증』 2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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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룡 / 1956년 경기도 양평 출생. 1985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2002년 《시와 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소리의 감옥』 『아주 잠깐』 『아름다운 도둑』 『하멜서신』 『다섯 손가락이 남습니다』 『단월』 『속이 뻔한 울증』, 저서 『황경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 『생명시학의 전제』 『풍경과 시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