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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죽은 사람 (외 1편) / 김기택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09.01.17|조회수422 목록 댓글 0
죽은 사람 (외 1편)

김기택




한껏 벌어져 다시는 다물지 못하는 입처럼
옷장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씹고 있는 음식물을 느닷없이 밀고 나온 토사물처럼
입에서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는 토사물처럼
옷들이 주르르 옷장 밖으로 엎질러져 있다
한 덩어리의 옷더미 속에 팔이 솟아나와 있다
다리가 여러 개 빠져나와 있다
누군가가 입고 있다는 듯 단추를 꼭꼭 채우고 있다
황급히 몸이 빠져나간 자리에 목이 솟아났던 구멍이 있다
팔다리에 손발이 돋아났던 자리가 있다
숟가락을 물고 식은 죽처럼
먹다가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입을 기다리는 죽처럼
뭉개진 모양 그대로 굳는다
목에 팬티를 덮어쓴 채 굳는다
팔에서 양말이 돋아난 채 굳는다
팔다리와 목과 가랑이가 머리카락처럼 엉킨 채 굳는다
몸 없는 채로 몸의 기억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것들이 굳는다
병원에 간 주인을 기다리는 늙은 개의 눈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주인을 킁킁거리며 찾는 코처럼
옷에는 하나같이 구멍이 뚫려 있다
제 안의 구겨진 어둠으로
구멍들이 황급히 빠져나간 목과 팔다리를 보고 있다



―《현대문학》200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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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죽은 지 여러 날 지난 그의 집으로
청구서가 온다 책이 온다 전화가 온다

지금은 죽었으므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겨주세요

반송되지 않는다
눈 없고 발 없는 우편물들이
바퀴로 발을 만들고 우편번호로 눈을 만들어 정확하게 달려온다
받을 사람 없다고 말할 입이 없어서
그냥 쌓인다 누군가가 뜯어봐 주기를 죽도록 기다리면서
무작정 쌓이기만 한다

말을 사정(射精)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혀들은
발육이 잘된 성욕을 참을 수 없어 꾸역꾸역 백지를 채우고
종이들은 제지공장에서 생산되자마자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은 책이 된다 서류양식이 된다
백골징포(白骨徵布)를 징수하던 조직적인 끈기가 글자들을 실어나른다

아무리 많이 쌓여도 반송할 줄 모르는
바보 햇빛과 바보 바람이
한가롭게 우편물 위를 어정거리고 있다


―《유심》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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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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