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 시 읽기

[시]12월의 곰사냥 / 이용한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09.02.08|조회수239 목록 댓글 0
12월의 곰사냥

이용한



초목이 난립한 덤불숲은 순진한 괴물로 가득하다
질척거리는 하늘에
나는 12월의 곰사냥이라고 썼다
그게 뭐냐고, 키 큰 물푸레나무가 착한 마누라처럼 묻는다
이를테면 네가 들고 있는 흑백사진 같은 거지
달팽이와 자동차가 지나간 정류장은 벌써 가랑잎에 묻혀서
우글거리는 벌레들의 간이역이 되었다
웅덩이마다 끈적하고 낡은 시간이 고여 있었고,
내가 먹어치운 빵 부스러기 같은 길들의 자취가
어느 새 배고픈 골짜기를 일으켰다
나는 킁킁거렸고 으르렁거렸으며 헐떡이고 미끄러졌다
멀리서 사냥꾼 짖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고,
온 몸에서 충동과 야만이 돋았다
이제 12월의 곰사냥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늑대 새끼를
차도에 몸 던진 취객으로 오해하지 않을 것이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고 보니,
정작 핸들을 잡고 있지 않다는 황망한 사실을
나는 신갈나무숲에 묻어야 했다
사실 난 용감하지도 않고, 방아쇠를 당길 줄도 모른다
내가 문 열고 나온 골목은 언제나 인색한 추억이 난무했다
어린시절의 도깨비를 몽둥이로 쳐버린 우매한 악마성은
풍경의 연민에 불 탄 배처럼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여기가 심연의 고래 뱃속일지라도
어느 날 고래 한 마리가 이 숲의 나무를 다 먹어치우고
바닷속으로 영영 사라진다 해도
12월의 곰사냥은 기어코 숨찬 협곡을 건널 것이고,
기꺼이 계곡이 다한 자궁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섭씨 5도의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혹은 가지 칠 수 없는 괴물들이
숲에는 가득하고,
진부한 출근의 방식으로는 이 울창한 시간을 기록할 수 없다
차라리 나는 가볍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순간 12월의 곰사냥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꽃과 저녁과 잎과 입이 얽히고 설킨 여기서 나는……
이제 막 변신을 시작한 반인반수의 꼬리를 힘껏 흔들어본다.


-----------------
이용한 / 1968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정신은 아프다』『안녕, 후두둑 씨』.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