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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이게 다예요 (외 1편) / 박연준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0.02.04|조회수400 목록 댓글 0

이게 다예요 (외 1편)

 

   박연준

 

 

까불고 싶어 지금 노란 하늘이야

관자놀이에 맺힌 너의 활을 좋아해

아슬아슬 떠다니는 네 질투를 좋아해

‘실패’라는 긴 칼을 가진 사랑아

내 가장 예쁜 구멍으로 들어오렴

시간에 무성한 털이 자라고 있어

곧 우리는 따뜻해질 거야

몸을 둥글게 말았더니, 그만 뱀이 되고 말았네

뱀, 기다란 시간!

미끄러운 음악이 아침부터 밤까지

꿈,틀,꿈,틀

발목 근처를 핥고

열 갈래의 꼬리로 흐느끼지

너를 먹고 싶다 후추를 뿌려서

오후 3시에, 접시에서 만나자

겨울처럼 딱딱한 두상을 가졌으면

내 머릿속에다 알을 까줄래?

오전이 채 시들기 전에 내가 먼저 시들겠지만

(이게 다예요)

네가 골라

A에서 G까지 한꺼번에 웃게 해줄게

까불고 싶어

너를 다 쏟아버린 후

숨 막히게 뛰어가고 싶어

 

   * 뒤라스의 책 「이게 다예요」에서 제목을 빌려옴.

 

 

위험한 기류

 

 

 

1.

‘앞니’를 ‘압니’라고 쓰고 싶은 충동이 일어요

견디기가 힘이 듭니다

융단이 어울리는 겨울나무를 향해

주문을 외우죠

 

2.

방 안에서 빨래를 개다 서른 살이 되었다

빨간색 양말의 짝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서른다섯이 되었다

내가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은 듯

아파트 창문을 밝히던 불빛들이 하나 둘 꺼지고 있었다

내 진짜 나이는 숨죽인 열다섯,

창문이 닫히고

비로소 편안한 밤이 내렸다

 

문지방이 약간 내려앉았다

종이컵으로 실 전화를 만들어 허공에 대보니

벽을 타고 시간이 건너다니는 소리

이마에 찍힌 도끼자국이 더욱 선명해졌다

간밤에 누가 내 이마 위에서 악을 쓰고 갔나?

 

종이컵 속에 입술을 파묻고 거울을 본다

늙은 개처럼 축축하고 몽롱한 눈

인사할까

불행한 거울, 불행한 주름, 불행한 개에게

 

 

                                                       —《문장웹진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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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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