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 (외 1편)
이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마취의 기술
나는 너에게 속해 있었다
저녁 숙소에 돌아와 누우려는데
무릎이 쓰리다
낮에 사진을 찍겠다고 무릎을 꿇었나보다
무릎 꿇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던가
시에게 사람에게 세상의 내침에 무릎 꿇은 적 있던가
어떻게라도 한번 무릎을 꿇었다니
가뜩이나 서어한 마음 괜찮지 않은가
설산을 넘는 밤길
옆자리에 누가 있어 무릎이라도 닿을 수 있어서
무장 긴 길을 갈 수 있다면 낫지 않던가
낯선 곳에 들어섰는데 자리에 온기가 남아 있다면
그래도 밤을 생각하면 낫지 않던가
왜
잊으면 낫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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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좋은 사람들」 「그날엔」 두 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바람의 사생활』『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