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아이들 (외 4편)
김선영
달에서 잠자리같이 비치는
날개 단 아이들이
쉴 새 없이 웃으며 뛰어내린다
웃음소리가 투명하게
지구를 울린다
내가 토해낸 레몬의 웃음마저
그 웃음소리에 토를 달고 있다
웃음의 이유도 모르면서
아이들은
여기저기 나뭇가지에
빈 벽에
영롱하고 투명하게 지졸대는 소리를
투망으로 짜 걸쳐 놓았다
귀
1
내 귀는 눈부신 골목이다
바퀴를 굴리며 날으는 음악
바흐와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가
나란히 짐을 지고 들어와
가득가득 곳간에 풀어놓는다
암무지개 수무지개 걸린 한 쌍의 귀만이 남아
하얗게 닦은 이빨로
내외(內外)가 사이좋게
하늘에서 따온
연한 가락을 씹고 있을 때
커다란 손가락이 내려와
음악소리 들리는 눈부신 두 귀를
살짝 집어간다
2
누가 내 귀를 떨어뜨린다
아찔하며 물 위에
떠 가는 귀
누가 내 귀를 쏜다
총을 맞고 벌판에 나자빠져
피 흘리는 귀
지금은 부드러운 손가락이
피를 훔치고 하얀 솜에 싸서
따뜻한 햇빛 위에 다시 걸어논다
가족
하늘은 푸르러
봄내 가꾼 배추밭이다
푸들거리는 잎사귀에 비가 뿌리고
우리들 마음속에서도
풋풋한 푸른 것이 성큼 자란다.
번쩍거리는 태양으로 또 한 번
온몸에 금칠을 하고
오늘 식탁에는
상치처럼 만발한 희망을 솎아서
접시에 담아낸다.
누군가 이웃들, 혹은 우리 중에
늘 손바닥에 슬픔을 못처럼 박아서
해가 지는 저녁에는
창 밖에 날리는 꽃잎과 겹친 걸음으로
돌아온다.
지붕 위 별들과
지붕 안의 별들이
충돌하는 저녁일지라도
고요의 자리는 쓸쓸하나 안심이 되어
바깥으로 나가려는 어지럼증을 불러들인다.
별들과 모여 사는 이웃들과
부엌문에 기대이면
내가 안은 항아리에 물보다 먼저 고이는 어둠
멀리서
칼소리
말발굽소리
문 빗장을 열고 받아들이는
검은 소리
가파른 도시에서 허위허위
돌아오는 혈연들이 보이고
바이올린 줄보다 가늘게
나를 묶는 슬픈
가족이 있다.
그 웃음은 몇 년 뒤
그 웃음은
몇 년 뒤면 싸움이 될 웃음
그 웃음은 한 나무의 잎사귀가 될 웃음, 그리고 그 나무를 삭정이로 만들 웃음.
그 웃음은 밭두렁에 엎드릴 쑥이 될 웃음, 볼우물 패며 먹을 쑥떡이 될 웃음
그 웃음은 머언 먼 바다의 수평선이 될 웃음, 파도의 하얀 물방울이 될 웃음
그 웃음은 배가 없는 자의 배가 될 웃음
돛이 될 웃음
캄캄 바다의 섬이 될 웃음
그 웃음은 갈라진 가뭄의 땅에 소나기가 될 웃음
그 웃음은 비 개인 자의 무지개가 될 웃음.
그 웃음은
따로 따로 서서
따로 따로 걸으며
언제나 따로 그림자를 달고 다닐 웃음.
먼 날
흙이 되면
웃음을 그물로 건지는 분이 있어
하나도 상하지 않고 건지는 분이 있어
건져서 풀꽃에
원광으로 걸어놓을
한 분이 있어.
고요
이 마을엔
제일 많은 것이
고요이다.
산에는
산만큼
들에는
들만큼
풀꽃 한 송이엔
풀꽃 한 송이만큼 고요.
개울에는
개울물 소리보다
더 큰 고요가
동구 밖으로 흘러간다.
고요가 냇물보다 큰소리를 내는
외딴 길에 서서
나는 고요의 여분이 되어 있다
아, 시간의 산맥을 넘어서서야 겨우 하나
무거운 고요를 가랑잎 같은 두 손으로도 번쩍 드는 법
칭얼대는 고요를 굽어진 잔등에 업어도 주는 법
비취의 달밤,
푸른 물감에 적신 고요를
온몸으로 입는 법도
알게 되었다.
고요를 외경하게 되었다.
—김선영(金善英) 시선집《그리움의 식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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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 1938년 개성 출생. 성신여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57년에 초회 추천, 1961년에 2회 추천, 1962년 《현대문학》에 서정주 시인의 추천 완료로 등단. 청미(靑眉)동인. 1973년 현대시학 작품상, 2008년 한국문학상 수상. 시집 『思歌』『허무의 신발가게』『풀꽃제사』『환상의 문지기』『밤에 쓴 말』『라일락 나무에 사시는 하느님』『思母曲』『쓸쓸한 것들을 향하여』『작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