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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투투섬에 안 간 이유 (외 2편) / 김영찬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0.12.12|조회수282 목록 댓글 0

투투섬에 안 간 이유 (외 2편)

 

   김영찬

 

 

 

나 투투섬에 안 간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투투섬 망가로브 숲에 일렁이는 바람

거기서 후투티 어린 새의 울음소릴 못 들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처녀애들은 해변에서 하이힐을 벗어던지겠죠

물살 거센 파도에 뛰어들어 미장원에서 만진 머리를

풀어젖힌다죠

수평선을 끌어당긴 비키니 수영복 끈은

자꾸만 풀어져

슴새들의 공짜 장난감이 된다는

투투섬에

나 그 섬으로

가는 티켓을 반환해버린 걸 결코

후회하지 않아요

쓰리당한 핸드백처럼 볼품없이 행인들 틈에 섞이다가

보도블록에 넘어진 사람 부축한 일 없지만

옛날 종로서적 해묵은 책먼지 생각이 떠올라서

풍선껌이나 사서 씹죠

 

―나 투투섬에 안 간 것 정말 잘한 결정이죠

 

발자국 수북이 쌓인 안국역 지나 박인환을 꼭 만날

예정은 아니더라도

마음속에 마리서사* 헌책방이나 하나 차리고

멀뚱멀뚱 토요일의 난간에 기대어

낡디낡은 태엽에 감긴 시간을 풀어주기도 하며

후투티 둥지 안에 투숙할까

그런 계획이죠

 

 

————

* 마리서사(茉莉書肆) : 시인 오장환(吳章煥)이 운영하던 책방을 박인환(朴寅煥)이 인수, 새롭게 운영하던 서점.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산실인 마리서사는 당대의 문인들이 응접실처럼 드나들던 곳. 서점 이름은 당대의 일본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船衛)의 시집 『군함마리(軍艦茉莉)』에서 따왔거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이기도 한)의 이름에서 빌려왔을 것이라는 설.

 

 

 

당신이 떠나간 후에

 

 

 

살구나무 아래에는 무엇이 있나

무엇이 남나

 

살구꽃 핀 살구나무 가지 사이 꽃구름은 흘러

시간은 빠르게, 서둘러 지나가버리고

살구꽃 하르르~ 하품하듯

꽃잎 떨어진 그 자리

 

—차양모자 아래에는 무엇이 남나

 

그것이 궁금하면 왜 진즉 살구나무 아래로 가서

손 내밀지 못했나

살구나무 그 아래에는 무엇이 남아있어야 하는 거냐고

우리들의 하얀 손금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어야 맞느냐고

왜 진즉 젖은 입술 촉촉할 때

물어보지 않았나

 

지나고 난 일 지워져 없는 대로 따져 묻지 않아도

살구나무 살구꽃 진 그 자리에 가면

살구나무 그늘만 있지

 

당신이 떠난 후에도 무채색 그늘만 남아있지

 

 

 

두 대의 피아노와 당나귀

 

 

 

두 대의 피아노와 한 마리 당나귀가 있다

 

당나귀는 귀가 너무 커서 타악기소리를 싫어한다

그러나 과도하지 않게

언제나 피아노 건반 위를 뚜벅뚜벅 걷는, 걸어가면서 산책 중

명상에 잠기는 습관이 있다

 

당나귀 발굽을 닮은 내 손바닥엔 두 대의 피아노

—한 대는 피아니시모

—또 한 대는 피아노포르테

흰 포말 부서지는 해안에서 안단테와 비바체

그리고

하얀 건반을 두드리고 지나가는 광풍들

 

해안선 저쪽에는

반라의 연인들을 그늘에 숨기는 검은 건반의 숲도 있다

 

두 대의 피아노와 한 마리 당나귀라고 나는 썼지, 그랬지

두 대의 당나귀와 한 마리 피아노라고

고쳐 적으련다

한 마리의 검은 피아노가 두 대의 당나귀 갈기와

말총꼬리를 붙잡고 속도를 내겠지

 

그러면 고리타분하기로 소문난 저 지구의 한 쪽 모서리가

발굽 닳아서

일상이 기우뚱 기울겠지

 

그러므로 과도하지 않게 ‘알레그로 마 농 트로포’로 가자고

당나귀 귀에 대고 속삭여야겠다

사랑은 allegro ma non troppo, 라고 피아노가

알아차릴 때까지

 

 

 

                            — 시집 『투투섬에 안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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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찬 / 충남 연기 출생. 한국외국어대학 프랑스어과 졸업. 2002년 《문학마당》, 2003년 《정신과 표현》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불멸을 힐끗 쳐다보다』『투투섬에 안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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