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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자모의 검 (외 3편) / 여정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1.04.28|조회수588 목록 댓글 0

자모의 검 (외 3편)

 

   여 정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 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 나면 자객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위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고 뇌가 썩고, 썩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떼의 날개짓이 장대비처럼 내린단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단다. 그날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떼를 불러들임이라.

 

   자객들의 말발굽 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가리니, 자모의 검일망정 결코 너희를 해(害)치 못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 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받았다' 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칼질

 

 

 

나는 그녀의 손을 꼭 거머쥐고 지하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나는 돈까스, 그녀는 비후까스

메뉴판이 우리를 조금 갈라놓는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이 수프를 떠먹는다

 

나는 돈까스, 그녀는 비후까스

수프를 담았던 빈 접시가 우리를 조금 더 갈라놓는다

나는 돈까스 위에 그녀를 살짝 올려놓는다

그녀는 비후까스 위에 나를 살짝 올려놓는다

나는 왼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왼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나는 6번의 칼질로 그녀를 19조각 낸다

그녀는 5번의 칼질로 나를 16조각 낸다

하지만,

우리는 중간중간 똑같이 샐러드를 먹는다

 

나는 커피, 그녀는 주스

음식을 담았던 빈 접시가 우리를 완전히 갈라놓는다

 

나는 오른손으로 사막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블랙커피를 마신다

그녀는 왼손으로 남극의 빙산이 둥둥 떠 있는 오렌지주스를 마신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똑같이 먹을 음식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녀를 자리에 두고 카운터로 가서 음식값을 치른다

나는 그녀를 자리에 두고 지하 레스토랑 계단을 오른다

 

 

 

고정된 사내

 

 

 

   벽에 붙박인 그 사내는 사각의 틀 속에 갇혀 정육점의 고기마냥 걸려 있다. 머리 윗부분이 잘린 오른쪽 귀가 잘린 그는 시선을 왼쪽 아래에 두고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는다. 입술에는 초승달을 베어 물고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링반지를 끼고 턱을 괴고 있다. 링반지 속에는 그 사내의 영혼 같은 한 여자가 가루가 되어 섞여 있다. 그 사내는 하반신이 없다. 그녀에게 갈 수 있는 길은 하반신과 함께 사라졌고 그녀 또한 그 길과 함께 사라졌다. 그는 늘 벽에 붙박여 꿈결 같은 그 길을 그녀와 함께 걸었던 그 마지막 길을 다시 거닐곤 한다. 그 길에는 풀냄새가 초록초록 싱그럽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 또한 향긋하다. 간혹 그 사내가 뜬눈으로 가위에라도 눌리는 날이면 도로를 이탈한 트럭이 풀들을 짓누르고 그녀의 젖빛 살냄새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달려온다. 그럴 때면 풀들조차 비명과 함께 하반신이 잘려나간다. 그런 날이면 벽에 붙박인 그 사내의 고정된 두 눈 속에서 피눈물이 마른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를 내며 흘러나오고 그 사내가 붙박인 그 벽조차 붉게 붉게 물들어 노을이 된다.

 

 

 

벌레 11호

 

 

 

   밥그릇에 담겨 꿈틀댄다. 밥알들이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식탁 위를 달려가는 벌레 4호, 입안에 든 숟가락을 번개같이 빼내어 쳐 죽인다. 오물오물 씹히는 밥알들이 벌레 4호 같다. 콩나물이 꿈틀댄다. 파김치가 꿈틀댄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벌레 5호, 젓가락으로 집어 들어 그 사이에 끼워 죽인다. 벽이 꿈틀댄다. 의자가 꿈틀댄다. 가만히 방바닥에 드러눕는다. 방바닥에 가만히 있던 벌레 6호, 드러눕는 등짝에 짓눌린다. 나도 몰래 죽인다. 살갗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 7호, 8호, 9호, 이리저리 뒤척이며 꾹, 꾹, 꾹, 눌러 죽인다. 천장이 꿈틀댄다. 몇 켤레 구두가 내 머리 위에서 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꿈틀댄다.

   벌레 10호, 잠을 뚫고 들어와 꿈속을 기어 다닌다. 투명한 재떨이를 들어 가만히 얹어놓는다. 서서히 죽인다. 죽은 벌레 10호를 재떨이에 담아 한 번 더 태워 죽인다. 꿈속에서도 꿈틀댄다.

 

 

                             —시집 『벌레』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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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 / 본명 박택수. 1970년 대구 출생. 계명전문대 경영학과 졸업.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자모의 검」 당선. 시집 『벌레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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