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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안개 그림자 / 김길나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2.01.12|조회수398 목록 댓글 0

안개 그림자

 

  김길나

 

 

 

너는 숨겨져 있다

유령놀이는 즐겁다. 오래된 우리의 숨바꼭질!

 

풍경을 장악하고 풍경을 무화시키는 이중의 폭력,

그것은 안개

불시에 쳐들어와 선명한 것들에게서 단조로운 권태를 지우고

형태의 완고성을 무산시키는 쿠데타,

그것은 안개

싱싱한 장미꽃이파리를 뜯어내고 먼 데서 모호한 구름을 끌어내려 꽃받침에 접붙인다. 장미를 죽였으나

장미의 재창조는 미완이므로 詩文의 행간에 쌓여 흐르는 환몽,

그것은 안개

‘나만을 바라봐 줘’ 사랑에 눈먼 에로스가 연인의 눈에서 타자를 지워버리려 한다

이기적인 성애의 비밀을 비밀 아래 감추는

그것은 안개

흑백과 천연색 꿈이 꿈밖으로 삐져나와 가상과 현실이 몽롱하게 뒤섞인다

꿈과 생시의 혼접, 환상과 실상의 혼돈,

그것은 안개

 

명료함을 감추는 취향은 차라리 미덕이라고, 안개가 안개의 어투로 웅얼거릴 때

펄럭이는 휘장에 가려진 아련한 것들이 눈물방울 같은 별빛을 끌어당기고

내 안개 그림자는 내 키를 넘어섰다

달콤한 숨결을 감고 잠이 엄습한 시간,

동침하는 잠과 죽음이 서로 그리움을 퍼내는 은밀한 몸짓으로 포개어진다

 

 

 

                              —《현대시학》201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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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나 / 1940년 전남 순천 출생. 1995년 시집 『새벽날개』로 등단. 시집 『빠지지 않는 반지』『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홀소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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