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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뿌리로부터 / 나희덕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2.01.15|조회수1,489 목록 댓글 0

뿌리로부터

 

   나희덕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 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문예중앙》 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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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등.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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