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아래 버드나무 그림자 (외 2편)
—주역시편 98
장석주
해가 뜨네.
금은(金銀)의 울음을 울며
살자 하네.
해가 있으니 밥술이나 떠먹고
버드나무가 있으니 그 아래를 걸었지.
살았으니까
살아졌겠지.
이미 얼면
얼지 않네.
늦지 않으려면 늦어야 해.
가지 않으려면 가야 해.
오지 않으려면 와야 해.
죽지 않으려면
죽어야 해.
달 아래 버드나무 그림자 짙고
버드나무 아래
한 사람이 걸어가네.
살면 살아지네.
버드나무 아래 한 사람이 걸어가네.
내가 만약 버드나무라면,
내가 만약 버드나무라면,
‘패배’라는 말
—주역시편 310
상처들의 봉합,
금관악기가 빠진 교향곡 연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어딘가 불완전하다.
하늘에서 개구리가 쏟아지던 곡우 지나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패는 이상한 하지도 지난다.
시립도서관 참고열람실에서
발달심리학 책을 들여다보던 19세도,
소녀의 따귀를 때리고 뛰쳐나온 이층집도 있다.
이제 우울도 사치 품목이다.
스물다섯 살이면 생활의 달인,
간접화법으로 소통하는 사회적 인간,
분유 두 통을 사 돌아가는 소시민 가장.
그림자들 대부분이 사라지고
지평선은 가장 먼 곳에 있다.
먼 곳은 바라보지 않으므로 더 이상 먼 곳이 아니다.
내 안의 우울이 우물이 되고
고독은 차라리 천직이 되었을 때
가끔 무릎을 꿇고 ‘패배’라는 말을
혼자 되뇌곤 했었지.
나는 스무 살 이후 길을 잃었다.
갈 수 없는 길들이 술 마시게 했다.
이 빠진 술잔들에 입술을 대며
더는 ‘패배’라는 말을 쓰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땡볕에 얼굴과 팔이 그을린 여름 소년은
무지개라도 먹고 싶었다.
어린 시절 뒤를 돌아보면
흙속에 묻힌 사금파리들이 반짝거리듯
미래가 보였지.
반쯤 뜬 눈으로 지나간 노란 꽃들을 바라보자,
‘패배’를 더는 모르는 불행을,
내일의 내일이거나
혹은 사물들의 사물들을!
느리게 걷자
—주역시편 515
우리는 너무 유능하지,
조금만
무능해지자.
우리는 너무 행복했지,
한 끼니쯤은 걸려
딱 그만큼만 불행해지자.
과거는 의붓아버지다.
의붓아버지가 유산을 물려줄 가능성은
없다.
현재는 가난한 生父다
유산이 있다면 주겠다만,
없다.
달 뜬 가을저녁,
물들이 어떤 생각들로 골똘해진다.
하천을 건너온 너구리가 들여다보는
저 부엌 안쪽은
천 년 동안
어떤 불공정도 없었던
상냥한 제국이다.
제국은 불꽃과 그림자를 가로지르는
국경을 갖고 있다.
백년에 한 번, 대나무 꽃이 핀다.
가을저녁의 부엌을 나와
대나무와 대나무 사이를 지나
수성과 목성 사이를
걷자.
—시집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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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햇빛사냥』『완전주의자의 꿈』『그리운 나라』『어둠에 바친다』『새들은 황홀 속에 집을 짓는다』『어떤 길에 관한 기억』『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붉디붉은 호랑이』『절벽』『몽해항로』『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