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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김밥에 관한 시 (외 1편) / 이근화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2.06.01|조회수1,172 목록 댓글 0

김밥에 관한 시 (외 1편)

 

   이근화

 

 

 

어쩌다 김밥에 관한 시를 쓰게 되었다

어쩌다 김밥을 먹게 되는 날이 있는 것처럼

김밥하면 천국이 떠오르고

천 원이나 천오백 원으로 어떻게 김밥을 말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김밥 둘둘 잘도 마는 조선족 아줌마들 월급이나 제대로 주는지

 

그러나 김밥에 관한 시를 먼저 써야 하는데

김밥하면 나는 친구 현숙이가 떠오른다

김밥을 좋아했는데 이제는 더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

김밥 때문은 아니고

살다 보면 그렇다 김밥 옆구리가 터지듯

그냥 얻어터지는 날도 있고

어제도 오늘도 만났던 사람을

 

어느 날 갑자기 만날 수 없게 된다

죽은 것도 아닌데 마음이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김밥 마는 여자를 좋아하던 평론가 형도 못 보게 되었다

같이 동물원도 가고 했는데 좋은 사람이었는데

김밥에 관한 시보다 김밥이 나는 더 좋다

파는 김밥은 잘 못 먹고

집에서 누가 좀 말아줬으면

 

첫아이를 갖고 앉은자리에서

김밥을 일곱 줄인가 여덟 줄을 먹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믿지 못할 일은 그것뿐이 아니다

빈곤한 내 상상력에 활력을 주려는 듯

아이가 침을 흘리고 또 흘리고 침은 참 맑다

 

김밥 같은 건 이제 말아 먹을 여유도 없지만

김밥에 관한 시를 써야 한다

쓰다 보니 멸추김밥처럼 웃긴다

내가 뭐 김밥에 관해 아는 게 있나 먹을 줄만 알지

먹을 줄 아는 게 다 아는 건가

 

요즘엔 초밥을 더 많이 먹는다

남편이랑 회전초밥집 가서 사만 오천 원어치나 먹어 치웠다

너무하다

사만 오천 원이면 김밥이 적어도 열여덟 줄인데

너무하다

그러고도 배가 썩 부르지 않았다

김밥 열여덟 줄이면 배가 터졌을 텐데

층층이 쌓인 접시만 원망했다

 

엄마 옆에 앉아

계란도 깨주고 깨소금도 뿌려주던 때가 있었다

꼬투리 먹으면서 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나 했는데

김밥 마는 날이면 새벽 네 시에 일어나던 엄마는

이제 다 늙어서 일곱 시 여덟 시까지 자도 된다

김밥이 그립듯 엄마가 그리우면

속이 정말 아플 것이다

그럴 것이다

 

김밥이 없으면 소풍도 그렇고 동물원도 그렇고 기차도 그렇다

생애 최초로 공들여 만 심심하고 뚱뚱한 김밥은

그 애가 참 잘 먹었는데

이제 김밥집 없는 곳에서 아들딸 낳고 잘 사는지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으면 어떡하는지

 

따뜻하고 부드럽고 간간한 김밥이었으면 좋겠는데

알록달록하고 가지런하고 고소한 김밥이었으면 좋겠는데

내가 그럴 수 있을까

하루에 이백 줄 한 줄에 십오 초면 되는

달인의 김밥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천국의 김밥 그리운 김밥 없는 김밥 영원한 단무지

 

김밥에 관한 시를 먼저 써야 하는데

김밥보다 김밥이 먼저 나를 이끈다

 

 

 

금 팔러 간 이야기

 

 

 

내게도 금은 있다

동전보다 빛나고 지폐보다 무거운 금이 있다

서랍에 처박혀 무거운 목소리를 내는 금이 있다

금값이 치솟고 고가매입 전단지와 안내판이 걸리니

공연히 그걸 꺼내 보았다

집안 경제도 못 챙기는 나는

유럽 경제나 미국 증시 같은 건 알 수 없다

동네 금방 아저씨 얼굴도 가물가물

가물치처럼 길쭉하고 기름졌던가

쌀을 안치기도 귀찮은 날

동네 칼국수 집에 들렀다가 가물치와 마주쳤다

이십이만 오천 원

한때는 이십오만 원까지 쳐줬단다

미끈한 정보 사이로 그의 눈빛이 빛났던가

나의 눈빛이 가물치처럼 찢어졌던가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설렁설렁 살고 싶은데

여행을 갈까 적금을 들까 코트를 살까

비스듬히 내리는 비가 오늘 내 서랍을 적신다

칼국수 속 드문드문 박힌 조개도

아까 잠깐 웃었던 것 같다

 

 

 

                               —시집 『차가운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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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 1976년 서울 출생. 단국대학교 국문학과, 고려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졸업.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우리들의 진화』『차가운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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