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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돼지라서 괜찮아(抄) / 김혜순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2.07.14|조회수1,115 목록 댓글 0

<장시> 돼지라서 괜찮아 (抄)

 

  김혜순

 

 

 

돼지는 말한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나는 선방에 와서 가부좌하고 명상을 하겠다고 벽을 째려본다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

더러워 나 더러워 진짜 더럽다니까. 정신? 나 그런 거 없다니까

 

그러나 머리는 좋지 아이큐는 포유류 중 제일 높지 청결을 좋아하지

난 화장실 넘치는 꿈 제일 싫어해 그 꿈 꾸고 나면 아이큐가 30은 빠져 

 

나는 더러운 물속에서 아침잠을 깬 사람처럼 쿨적거린다

코를 풀고 싶지만 선방엔 휴지가 없다 스님들은 콧물 안 나오나?

 

있지, 너 돼지도 우울하다는 거 아니? 돼지도 표정이 있다는 거?

물컹거리는 슬픔으로 살찐 몸, 더러운 물, 미끌미끌한 진흙

 

내가 로테르담의 쿤스트할레에서 얀 배닝이라는 사진가가 일제 식민지 치하

수마트라 할머니들 찍은 사진을 봤거든 그런데 그 사진 속 표정은 딱 두 종류였어

 

불안 아니면 슬픔, 그래서 난 걸어가면서 그 주름 얼굴들에게 이름을 붙여줬지

당신은 불안, 당신은 슬픔, 슬픔 다음 불안, 불안, 슬픔, 슬픔.

 

나의 내용물, 슬픔과 불안, 일평생 꿀꿀거리며 퍼먹은 것으로 만든 것

슬픔과 불안, 그 보리밭 사잇길로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돼지 한 마리 지나가네

 

그런데 돼지더러 마음속 돼지를 끌어내고 돼지우리를 청소하라 하다니

명상하다가 조는 돼지를 때려주려고 죽봉을 든 스님이 지나간다

 

아무래도 돼지를 십자가에 못 박는 건 너무 자연스러워, 의미 없어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 나한테 템플스테이는 정말 안 어울려

 

있지 조금 있다 고백할 건데 나 돼지거든 나 본래 돼지였거든

 

 

(38쪽~56쪽 중략)

 

 

피어라 돼지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나는 밤마다 우리나라 고문의 역사를 읽다가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저 산 아래 지붕들에 대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나에겐 노래로 씻고 가야 할 돼지가 있다

노래여 오늘 하루 12시간만 이 몸에 붙어 있어다오

 

시퍼런 장정처럼 튼튼한 돼지 떼가 구덩이 속으로 던져진다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 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는다

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는다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 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돼지나무에 돼지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밤

 

 

(60쪽~61쪽 중략) 

 

 

산문을 나서며

 

 

몸 버리고 가라는데 몸 데리고 간다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돼지 데리고 간다

 

꿈속에서 나가

이제 그만 새나 되라는데

몸속에서 새가 운다

 

이제 그만 안녕 너 없이도 살 수 있어

 

돼지가 따라온다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 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뱃속에 가득 망각이 들어간 저 여자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 든 여자

지나가던 소녀가 침을 탁 뱉는 바로 저 여자

길거리 모퉁이에 서 있으면 모두 달아나버리는 저 여자

무서운 아저씨들의 장화 밑에서 우글거리는

글의 집이 너무 좁아 피할 줄도 모르는

때 묻은 얼굴이야 더러운 엉덩이야 피 묻은 발톱이야

날 데리러 오는 장의차 소리는 귀신같이 아는 바로 저 여자야

무서워서 먹고 무서워서 소리치고 무서워서 또 먹는 바로 저 여자야

나는 입술에 붙은 밥통이야 뱉은 걸 먹고 싼 걸 먹는 바로 저 여자야

역겨운 여자 냄새나는 여자 미친 년 맞는 년

내가 접시에 누우면 맛있는 소스라도 발라서 구워줄래?

못생긴 여자야 하루에 한 움큼씩 항생제 먹는 여자야

네가 나를 사랑해주겠다고 동정해주겠다고 그러지만

나 돼지야

 

그런데 한마디 덧붙이자면 나 재미있는 돼지야

나는 이렇게 생긴 비밀이야 유머가 터질 듯해서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차고 놀 수 있는 오줌보야

 

돼지 한 마리가 산문을 나서는 나를 멀찍이 따라온다

36도 5부 방에서 나왔으니 춥겠지? 냄새나는 코트 들고 따라온다

 

기쁘다 돼지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문예중앙》2012년 여름호

                        * 일부만 소개한 이 장시는 《문예중앙》여름호 36쪽부터 63쪽까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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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어느 별의 지옥』『우리들의 陰畵』『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 기계』『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 잔의 붉은 거울 』『당신의 첫』『슬픔치약 거울크림』.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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