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좋은 시 읽기

[시]커다란 나무 (외 1편)/ 김기택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2.11.02|조회수590 목록 댓글 0

커다란 나무 (외 1편)

 

   김기택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살을 찢으며 갈라진다

갈라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 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는 듯 갈라진다

태곳적부터 갈라져 있는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헤아릴 수도 없이 가보아서 눈 감고도 알 수 있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점점 튀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고속도로 4

 

 

 

트럭 앞에 속도 하나가 구겨져 있다.

부딪쳐 멈춰버린 순간에도 바퀴를 다해 달리며

온몸으로 트럭에 붙은 차체를 밀고 있다.

찌그러진 속도를 주름으로 밀며 달리고 있다.

찢어지고 뭉개진 철판을 밀며

모래알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유리창을 밀며

튕겨나가는 타이어를 밀며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고 있다.

겹겹이 우그러진 철판을 더 우그러뜨리며 달리고 있다.

아직 다 달리지 못한 속도가

쪼그라든 차체를 더 납작하게 압축시키며 달리고 있다.

다 짓이겨졌는데도 여전히 남아 있는 속도가

거의 없어진 차의 형체를 마저 지우며 달리고 있다.

철판 덩어리만 남았는데도

차체가 오그라들며 쥐어짠 검붉은 즙이 뚝뚝

바닥에 떨어져 흥건하게 흐르는데도

속도는 아직 제가 멈췄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있다.

 

 

 

                       —시집『갈라진다 갈라진다』

-------------

김기택 /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곱추」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 등.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