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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수풀로 이파리로 / 이제니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2.12.21|조회수490 목록 댓글 0

수풀로 이파리로

 

   이제니

 

 

 

어젯밤에는 사시가 되는 꿈을 꾸었다

너를 보는 내 눈동자가 자꾸만 도망갔다

 

한 시간에서 한 시간으로

한 기억에서 한 기억으로

 

너는 길 끝에 서 있었다

영원히 도착할 수 없으리라는 암시는

내 눈동자가 너를 지나치기 전의 일이었다

 

이파리는 건너뛴다

수풀은 끊이지 않는다

 

환각을 따라 망각하듯이

망각을 하듯 환각을 따라

꿈인 것을 아는 꿈속 꿈처럼

 

미안하구나 내 눈동자가 옳았다

나는 너를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어

네 곁을 비껴가던 무수한 이파리들

 

이파리는 다시 건너뛴다

행운에서 불운으로 건너뛰듯이

 

수풀로 이파리로 수풀로 이파리로

 

이 수풀을 건너가면 나는 너를 말할 수 있으리라

오래전 보았던 그것이 바로 내 미래임을 알아차리듯

 

너는 휘파람을 부르듯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너의 목구멍 속에서 솟아오른다

 

허튼 눈동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해 미워하듯이

자신의 가장 밑바닥에 도착하는 방식으로

 

수풀로 이파리로 수풀로 이파리로

 

 

 

                      —《현대시학》201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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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니 / 1972년 부산 출생. 2008년 〈경향신문〉신춘문예에 「페루」당선.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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