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 그림자 (외 2편)
정우영
나는 마흔아홉 해 전 우리 집
우물곁에서 베어진 살구나무이다.
내가 막 세상에 나왔을 때 내 몸에서는
살구향이 짙게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오랫동안 등허리엔 살구꽃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목울대엔 살구씨가 매달려 있었다.
차츰차츰 살구꽃 그림자는 엷어졌으나
서러운 날 꿈자리에서는 늘 우물곁으로 돌아가
심지 굳은 살구나무로 서 있곤 한다.
그럴 때마다 전설과도 같은 기쁨과 슬픔들이
노란 전구처럼 오글조글 새겨진다.
가끔 눈 밝은 이들이 조용히 다가와 내 어깨에
제 목 언저릴 가만히 얹어놓는다.
그러면 살구나무가 기록한 경전이 내 눈에서
새록새록 돋아나와 새콤하게 퍼지는 우주의 기밀,
슬그머니 펼쳐 보이기도 한다.
언젠가 별 총총한 그믐날 밤 나는,
가만히 눈 기울여 천지를 살피다가
다시 몸 부려 살구나무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 이전의 역사이다.
어둠이 머무는 의자
당신이 앉았던 의자에 어둠이 내려온다.
여전히 당신의 온기가 따스한지 어둠은
깃털 부풀려 겨울별들 떨어낸다.
의자 밖으로 뿌려지는 빛무리가 탐스럽다.
당신 대신 어둠이 머물고 있는 의자를
감은 눈으로 가만가만 쓰다듬는다.
다가가지 못하는 내 망설임을 읽었는지
아니면 어둠의 내밀한 힘을 빌렸는지
의자가 나긋이 걸어와 당신이 그런 것처럼
등 뒤에서 나를 꼬옥 껴안는다.
등에서부터 발열된 전기가 온몸으로 찌르르 번져가고
귓등에 치명적인 입김이 부어지더니
의자가 나를 통째로 삼켜 버린다.
그렇게 나는 실종되었다.
즐겁게, 광막한 당신 속을 떠다니는 중이다.
압구정동이라는 사막
아저씨, 내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요? 어찌 들으면 참 섬찟하기도 하지만 지하도는 너무 심심하니까. 여기서 산다는 게 참 막막하기도 하고. 자, 궁시렁거리지 마시고. 예쁜 여자 전갈 하나가 잘생긴 남자 전갈 몇 명을 데리고 사막을 걸어갑니다. 좋겠다구요? 그럼요, 좋지요. 청춘 남녀잖아요. 아마 사막이 사막 같지 않을걸요? 에이, 그런 엉뚱한 상상 땜에 좋은 건 아니구요. 그런데요, 이렇게 정답게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말이에요. 예쁜 여자가 그중 제일 여리고 귀여운 남자를 은근슬쩍 부른다네요. 남자는 좋아라 다가가겠지요. 여자는 남자 목 잡아 끼고 꼬옥 껴안는답니다. 남자는 앙큼한 생각에 이게 뭔 일이다냐, 황홀하고 몽롱해져서는 가만히 있는다지요. 그러면 여자는 남자의 사타구니를 쓱 벌린 다음 자기 성기를 콕 찔러 넣는대요. 나른하게 퍼지는 게 독인지도 모르고 남자는 오르가슴에 떨겠지요. 독 퍼질 즈음에서야 비로소 정신 차리고 반항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미 독 퍼진 다음이라 몸 축 늘어질밖에요. 남자는 제 대가리 뜯어 먹는 여자의 사각거리는 입질 소리 어질어질 들으면서 세상 하직하겠지요? 잔인하다고요? 사막인데요? 나도 너를 잡아먹고 너도 나를 잡아먹지 않을까요? 사막에서는. 에이, 거짓말 말라구요? 그런 사막이 어디 있느냐구요? 저기요, 압구정동이라는 사막, 막 또 다른 여자 전갈과 남자 전갈이 길을 나서네요. 한번 쫒아가보세요. 내 말이 맞나 틀리나.
—시집 『살구꽃 그림자』(201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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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영 / 1960년 전북 임실 출생. 숭실대 국문과 졸업. 1989년 《민중시》로 작품활동을 시작. 시집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집이 떠나갔다』『살구꽃 그림자』, 시평 에세이집『시는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