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책
강미정
그 중 한 페이지를 넘기면
당신이 나를 업고 모래사장을 걸어간다
한 발 두 발 푹푹 발이 빠진다
이렇게 발 푹푹 빠지는 웅덩이 같은 시간을
이렇게 무겁게 휜 등짐 같은 계절을 업고
당신이 간다
푹푹 파인 무수한 발자국 위에
뚜렷하게 당신 발자국을 겹치며 간다
모래가 덮이는 발자국
떨림이 되어 스미는 발자국
내 등에 업힌 너의 무게는
깃털이 되어 가볍게 날아가는 무게지
두 발 푹푹 무겁게 빠지는 모래의 무게지
반은 날숨으로 반은 울음으로
가늘게 울리던 당신 목소리가
당신 등을 타고 내 가슴으로 전해진다
내가 당신에게 막막한 무거움일 줄을
당신을 업어보지 않고 어찌 알았겠는가
아득히 멀던 당신의 무게도
당신이 나를 업었던 한 페이지에 남아
점점 가벼워졌을까
나를 업은 당신만이 푹푹 두 발 빠지며
모래사장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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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의 책 : 보르헤스—그 어떤 페이지도 첫 페이지가 될 수 없고 어떤 페이지도 마지막 페이지가 될 수 없다.
—《시와 사상》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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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정 /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타오르는 생』『상처가 스민다는 것』『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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