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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모래의 책 / 강미정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3.03.21|조회수435 목록 댓글 0

 

모래의 책

 

   강미정

 

 

 

그 중 한 페이지를 넘기면

당신이 나를 업고 모래사장을 걸어간다

한 발 두 발 푹푹 발이 빠진다

이렇게 발 푹푹 빠지는 웅덩이 같은 시간을

이렇게 무겁게 휜 등짐 같은 계절을 업고

당신이 간다

푹푹 파인 무수한 발자국 위에

뚜렷하게 당신 발자국을 겹치며 간다

모래가 덮이는 발자국

떨림이 되어 스미는 발자국

내 등에 업힌 너의 무게는

깃털이 되어 가볍게 날아가는 무게지

두 발 푹푹 무겁게 빠지는 모래의 무게지

반은 날숨으로 반은 울음으로

가늘게 울리던 당신 목소리가

당신 등을 타고 내 가슴으로 전해진다

내가 당신에게 막막한 무거움일 줄을

당신을 업어보지 않고 어찌 알았겠는가

아득히 멀던 당신의 무게도

당신이 나를 업었던 한 페이지에 남아

점점 가벼워졌을까

나를 업은 당신만이 푹푹 두 발 빠지며

모래사장을 걸어간다

 

 

———

* 모래의 책 : 보르헤스—그 어떤 페이지도 첫 페이지가 될 수 없고 어떤 페이지도 마지막 페이지가 될 수 없다.

 

 

                      —《시와 사상》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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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정 /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타오르는 생』『상처가 스민다는 것』『그 사이에 대해 생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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