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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외 1편)/ 박판식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3.08.05|조회수816 목록 댓글 0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외 1편)

 

   박판식

 

 

 

모자와 박쥐우산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울리지 않는 물건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다

애완용 개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생명이 있다면

더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는 딸이 없다, 나와 어울리지 않아서다

 

하지만 내 인생은 태어나지 않은 딸과 늘 동행하고 있다

웅덩이가 모자처럼 떨어져 있다 인생은

그 위를 지나가는 멀리서 온 구름이다

옷을 입은 개가 맨발일 때

이 경이로운 세상을 둘러보기 위해 얼굴이 세 개나 네 개로 늘어날 때

모자 대신 접시를 머리에 얹고 걸어도 이상할 게 없다

 

개업식 경품 행사로 1등 자전거에 당첨된 일이 있다

빵집 주인이 내 이름을 세 번 연속 불렀는데

끝내 나가지 않았다, 빵집은 반년 만에 폐업했고

이 시장 골목에선 흔한 일이다, 처녀 시절 아내가 키우던 개가 죽었다

개는 죽기 직전 젖은 걸레 위로 올라갔고

자신의 똥 위로 올라갔고 이부자리 위로 올라갔고 나의 배 위로

올라갔다, 죽은 개는 나와 어울린다, 개가 죽고 문득

아들이 태어났다

 

 

 

(球)

 

 

 

나는 흰 빗자루를 들고 있다

성장하려는 고양이의 옆구리를 간질여

작은 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괴롭히고 있다

슬리퍼와 고아는 뒤축이 닳고

점박이 돌인 줄 알고 주웠던 알은 이불 속에서

자극을 주어도 무엇으로도 태어나지 않는다

불안은 순결한 목소리로 숲 비둘기 흉내를 낸다

여자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일과를 마친 남자 선생들이 축구를 한다

공은 교실이 있는 어두운 건물로 굴러 들어가고

삼삼오오 모인 여학생이

잠시 공 없이 서 있는 남자 선생 구경을 한다

연못가 시계탑의 조각상은

무엇인가를 버티면서 전신의 힘을 발 끝에 주고 있다

태양과 달이 아무렇게나 공중에 떠 있는 하루

비 그친 옥상에 방치된 새끼 고양이는

파리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

 

 

 

                        —시집『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201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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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판식/ 1973년 함양 출생. 200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밤의 피치카토』『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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