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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밤의 숙박계/ 윤성택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3.12.03|조회수434 목록 댓글 0

밤의 숙박계

 

   윤성택

 

 

 

가방을 비우자 여행이 투명해졌다

기약하지 않지만 이별에는 소읍이 있다

 

퇴색하고 칠이 벗겨진 간판은 한때

누군가의 빛나는 계절이었으므로 내일은

오늘 밖에 없다 친구여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아직도 여인숙에서 기침을

쏟고 싸늘히 죽어가는 꿈을 꾸기 때문이네

 

수첩이 필체를 혹독히 가둘 때

말의 오지에서 조용히 순교하는 글자들,

나는 망루에 올라 심장의 박동으로 타오르는

소각장을 본다네

 

신발을 돌려놓으면 퇴실이요

이곳 숫자는 주홍 글씨라네

 

이불을 쥐는 손으로 만지는

전구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호실을 밝힌다

 

아름답다, 라고 슬프게 발음해 보는 날들이

좀체 돌아오지 않아도, 빈 집은 제 스스로

별을 투숙시키고 싶다

 

적막은 밤의 숙박계,

치열이 고른 지퍼에 밤기차가 지나면

어느 역에서 가방이 나를 두고 내린다

 

 

 

                       —《미네르바》201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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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택 /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신인상에 「수배전단」외 2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리트머스』『감(感)에 관한 사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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